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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㊽ 데자뷔

입력 : 2016-09-21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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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deja vu)

 

프랑스어 데자뷔는 우리말로 기시감(旣視感)이라 번역한다. 어떤 사물과 사건을 마주했을 때 어디선가 이전에 경험한 것같이 느껴지는 착각을 일컫는 심리학 용어이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감(感)’이 아닌 ‘사실(史實)’로서의 데자뷔가 많다. 강대국이 세력싸움을 벌이는 지정학적 위치에 터를 잡은 우리는 그런 사실적(史實的) 데자뷔를 정말로 예민하게 느끼고 영악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다.

 

명이 쇠락하고 청이 일어서든 시기에 명은 청의 뒷등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조선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청을 공격하라고 요구한다. 그 때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이 왕세자였던 시절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왜란)을 당해 존망의 위기에 처했고 명으로부터 적지 않은 군사적 지원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그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조선 조정의 의론은 은혜를 갚기 위해(요즘 말로 하면 ‘혈맹의 도리’라고 할까) 당연히 명을 도와야함은 물론이고 오랑캐인 청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청의 세력이 만만치 않으며, 소국이 대국의 세력 재편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었다가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는 ‘영악스러운’ 정세판단을 하여 파견군 사령관 강홍립에게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청에 투항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강홍립은 이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는 투항한 뒤에도 대륙의 정세 변화를 수시로 광해군에게 내밀하게 알렸다. 광해군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을 키웠고 반대세력은 쿠데타로 그를 몰아냈다. 쿠데타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명을 적극적으로 섬기지 않았고 오랑캐(청)과 화친하였다는 것이었다.

 

쿠데타 세력이 옹립한 인조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은 명을 삼키기 전에 배후의 위협자인 조선을 확실하게 장악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두 차례 호란의 동기이자 목적이었다. 인조는 청의 침략군 사령관 앞에 나아가 참담하고 치욕스러운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나아가 항복이 큰 은혜라는 내용의 글을 새긴 비석(서울 송파 삼전도비)을 세워야 했다. 청에 포로로 잡혀있던 강홍립은 청의 의도에 따라 귀국하여 청과 조선의 강화를 주선했다. 청군이 물러간 후 강홍립은 조국에 남았고 오랑캐에 투항한 역적이라 하여 정치적 박해를 받다가 죽었다.

 

위의 사실(史實)에 등장하는 주요 출연자들의 이름에다 그 역할에 따라 지금 이 시대의 이름을 대입하면 사실(史實)은 현실과 흡사하지 않은가? 무엇이 중요한 국익인지는 옛날 역사 속에서 해답이 나와 있는 것 같다.

 

‘싸드’ 배치 문제를 두고 나라가 시끄럽다. 그런데 대통령은 ‘싸드’는 안보문제이고 안보에는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횡행한 ‘국민총화(國民總和)’란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말 많고 토 달면 빨갱이’란 그 시대의 속어도 생각난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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