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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61] 최후의 황군(2) 계속되는 은둔 패잔병 영웅만들기

입력 : 2017-04-10 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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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황군 (2) 계속되는 은둔 패잔병 영웅만들기

 

요꼬이는 1972년 1월에 미국령 괌에서 발견된 후 2월에 귀국했다. 일본 언론은 그를 투항을 치욕으로 여기도록 가르친 ‘전진훈(戰陣訓)’을 27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지킨 영웅적인 ‘최후의 황군’으로 띄워 올렸다. 귀국 후에 요꼬이는 상점을 열고 집 뒤뜰에다 ‘밀림 동굴생활 박물관’이란 걸 차려놓아 사람들이 모이게 만들었다. 1974년에는 참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4년 3월에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란 또 한명의 ‘최후의 황군’이 필리핀 루방 섬에서 ‘투항’했다(계급은 육군 소위). 그는 1944년에 일본제국 육군의 간첩양성학교인 나가노학교를 마치고 3명의 부하와 함께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밀림 속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1949년에 대원 가운데 한 명이 밀림에서 나가 투항했지만 오노다는 나머지 부하 두 명을 데리고 계속하여 ‘명령을 기다렸다’. 1952년에는 일본 정부가 투항을 독려하는 선전대를 현지로 파견했으나 아무 성과 없이 돌아왔다. 1972년 10월, 오노다의 마지막 남은 부하가 현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에 총탄에 맞아 죽었고 밀림에는 그 한사람만 남았다.


▲ 태평양전쟁후'정글생활 29년' 前 일본군 소위 사 망, 태평양 전쟁 종료 후 29년간 필리핀의 정글에서 버티다생환한전일본군소위오노다히로씨가16 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군복 을그대로입은채무기와전투장비를갖춘오노다가 1974년 3월 투항후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자료출처: 연합뉴스)

 

1974년 2월, ‘민간탐험가’ 스즈키가 혼자서 밀림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오노다를 마주쳤다. 스즈키는 귀국 방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3월에 한 무리의 티브이 카메라 멘과 신문기자가 오노다가 숨어있던 밀림으로 몰려왔다. 오노다의 형이 확성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외쳤고 투항을 권유하는 플래카드를 단 열기구를 떠올렸다. 일본의 심리전 전문가의 제안에 따라 ‘최후까지 전투를 벌인 황군’을 밀림으로부터 유인해내기 위해 일본군이 ‘승리’했으며 ‘영웅’을 영접하기 위해 대부대가 본국에서 온 것처럼 연출하였다. 오노다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의 옛 상사가 ‘항복명령’을 하달하고, 수백 명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옛 상사가 오노다를 데리고 나왔다. 언론은 ‘강인하게 버텨낸’, ‘우수한 황군’의 ‘충성과 희생’을 극적으로 미화했다.

 

일본 국내에서 오노다의 신화가 한참 만들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새로운 ‘최후의 황군’이 또 나타났다. 1974년 12월, 인도네시아의 밀림 속에서 자칭 나까무라(中村)라는 황군 병사가 나타났다. 일본 언론은 다시 열광했다. 그런데 그 광기는 갑자기 식었다. 그리고 나까무라는 출연정지당했다. 알고 보니 이 황군 병사는 대만인, 더 정확하게는 ‘이광휘(李光輝)’란 이름을 쓰는 고산족 원주민이었다. 기자회견에서, 왜 부대를 떠나 30년이나 혼자서 밀림 속을 돌아다녔냐는 질문에 “그들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옛 전우들을 만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보고 싶지 않다. 그들은 너무 싫다”고 답했다(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식민지인 대만과 조선에서 병력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했다. 일본인과 한족으로부터 이중의 착취를 당하던 대만 고산족가운데서는 곤궁한 생활을 면하기 위해 기꺼이 일본군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병사를 길러낸 그 시대와 그 문화를 좋은 눈길로 바라볼 수가 없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병사가 자랑스러운 표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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