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이해와 오해 [65] 전학삼을 생각한다

입력 : 2017-06-14 14:41:00
수정 : 0000-00-00 00:00:00

 

전학삼을 생각한다

 

유인우주선을 우주로 보내는 기술은 모든 과학기술의 총합이며 국가적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는 사업이다.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린 나라는 러시아, 미국, 중국 세 나라 뿐이다. 중국이 미사일, 핵무기, 유인우주선을 개발할 수 있었던 기술적 기반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전학삼(錢學森, 첸쒜썬, 1911~2009년)이란 과학자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곱씹어 볼만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는 청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으로 죽었다.

 

그는 1935년에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MIT와 칼리포니아공대)으로 가서 공기동력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장학금이 또한 역사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1889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고, 결국 8개국(영·불·미·러·이·일·독·오)이 (자국민보호를 명분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난을 진압했다. 이때 청 정부는 8개국에 피해보상금을 지급했다. 미국은 이 보상금을 중국의 교육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반환했는데, 그래서 세워진 대학이 지금의 청화대학(1911년 설립)이고 이 학교가 도미 유학생을 선발하고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는 1944년에는 미군 점령하의 독일로 가서 로켓개발에 참여한 독일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작업에 참여했고, 이들이 훗날 NASA의 인력과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1949년에는 (미 공군전력 개발의 핵심기지인) 제트추진연구소 소장이 되고 이어서 미 공군의 고문이 된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전학삼은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1950년대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공 매카시즘, 군사기술이 중공으로 유출되는 것을 꺼린 미국 정부의 제재 때문에 그는 5년 동안이나 연금 상태에 놓였다. 당시 미 해군부 차관은 전학삼 한 사람의 지식이 5개 사단 병력과 맞먹는다며 그를 돌려보내느니 죽여 버리는 게 낫다고 말했다.


▲ 칼텍 교수시절 전학삼. 로켓 원리를 강의하고 있다.

1954년에 제네바에서 프랑스 철수후의 월남문제와 한국의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 소불, 영, 중공이 참석한) 회담이 열렸다. 미국과 중공 사이에 한국전에서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를 돌려주고 전학삼을 귀국시킨다는 막후 합의가 이루어졌다. 훗날 주은래 중공 수상은 “제네바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전학삼의 귀국이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1991년 중국 정부는 그에게 “국가를 위해 걸출한 공헌을 한 과학자”란 명예 칭호와 1급 모범영웅훈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전학삼은 수상연설의 절반을 할애해 아내와 예술을 찬양했다.

 

“결혼 한지 44년이 되었습니다. 아내 장영(蔣英, 쟝잉)과 나는 전공이 전혀 다릅니다. 아내는 소프라노 가수입니다. 나는 아내 덕분에 독일 고전 가곡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술이 포함하고 있는 시적 정서를 통해 나의 인생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고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은 풍부해졌습니다. 아내로부터 예술방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완고하고 기계적인 유물론자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의 중국과 미국의 대결 양상을 보면서 전학삼의 이력에서 역사의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의 예술찬양론이 더 큰 울림으로 닥아 온다.

완고하고 기계적인 공산주의자(또는 자본주의자)가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66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