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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37) 독재자의 무덤

입력 : 2022-05-10 01:53:05
수정 : 0000-00-00 00:00:00

이해와 오해 (137)

독재자의 무덤

박종일

 

▲ 전몰자의 계곡 (출처 : 나무위키)
 

프란치스코 프랑코 바아몬데(1892~1975)는 쿠데타(내전: 1936~1939)를 일으켜 스페인의 제2공화국(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1939년부터 1975년까지 40년 가까이 스페인을 통치한 군인 독재자이다. 그가 통치한 시기를 프랑코(독재)시대라고 부른다. 내전이 끝나자 그는 모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분쇄했다.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은 군대, 어용정당(팔랑헤당), 가톨릭 교회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무자비하게 제거했고 정치 단체나 노동조합 등 일체의 조직을 철저히 파괴했다.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는 문을 닫았고 언론인은 투옥되었다.

프랑코시대에 처형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정치적 반대자들이 3만 명에서 5만 명 사이, 여기에 내전 기간에 죽은 사람까지 합하면 군부독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45만 명으로 추산하는 통계도 있다). 이런 억압을 피해 1950~60년대에 25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스페인을 떠나 인근의 프랑스 등으로 이민하였다.

그는 스페인 각지에 자신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우고 또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정부군)으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다 숨진 장병들을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전몰자의 계곡(Valle de los Caídos)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쿠데타군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돌산 위에 150미터의 십자가상을 세우고 바위산을 뚫어 지하 성당과 납골당을 만든 거대한 기념물이었고, 공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민전선 포로들과 정치범의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코는 마침내 19751120일에 죽었다(83). 헨리 키신저는 1970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은 지금의 삶이 끝나야 유럽의 역사에 다시 참여할 수 있다.” 스페인이 독재체제를 끝내고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전환기를 맞았을 때 프랑코시대가 남겨놓은 분열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그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기가 위험스러웠다.

새천년이 시작되고 난 뒤에야 역사적 기억의 회복이 진지하게 시작되었고 프랑코의 위상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6, 스페인 내전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에 프랑코 시대에 관한 광범위한 대중적 토론이 일어났다. 내전 기간 동안의 여러 가지(전부는 아니고) 고통과 탄압, 독재체제 아래서 저질러진 잔학행위들이 하나씩 햇볕 아래로 불려나왔다. 2008년부터 사회당 정부는 프랑코시대에 처형된 사람들의 집단 매장지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2007년에 사회당 정부는 전몰자계곡의 교회당에 있는 프랑코의 무덤 앞에서 옛 독재자를 추모하는 정치적 집회를 금지했다. 이곳은 사회당 정부에 의해 2009년에 폐쇄되었다가 3년 뒤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런데 프랑코의 유해는 몇 년 동안의 정치적 논쟁을 거친 후 2019년에 전몰자계곡에서 옮겨졌다. 이것은 내전의 분열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프랑코를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가족묘지에 매장했다고 해서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십 년 동안의 분열과 대결이 종결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매듭은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프랑코가 죽던 1975년에 한국에서는 유신헌법이란 게 나왔고,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이 처형당했고, 독립 운동가이자 야당 정치인 장준하가 살해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군인독재자 박정희는 측근이 쏜 총에 맞아 죽었고 그가 키운 전두환이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40년이 지나 (지난 해 말) 전두환도 죽었다. 그는 묻힐 곳을 얻지 못한 체 뼛가루가 되어 자신의 옛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독재자에게는 온당한 묘지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프랑코가 통치한 나라보다 조금은 선진적일까? 씁쓸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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