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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133)-사격의 여신 허성숙

입력 : 2021-12-27 01:34:41
수정 : 2021-12-27 03:07:42

사격의 여신 허성숙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박종일

  허성숙(許成淑)1915년에 길림성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茶条沟仲坪村)의 조선족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20세기 20년대 초에 만주로 망명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벌였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중평촌에 농민야학교를 열어 농민사회에 문화와 지식을 보급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의 이념을 선전했다. 허성숙은 소학교 3학년을 마친 후 중평촌의 야학에서 공부했다. 점차로 정치적인 의식을 갖추어 가는 허성숙을 못마땅하게 여긴 부친은 딸의 야학 공부를 금지했다. 허성숙은 아버지의 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대항했다. “나는 배우고 싶고, 배운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1933년 초, 허성숙은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같은 해 8월 그녀는 연길현 항일유격대에 참여한다. 유격대에 참여한 직후 그녀는 일본군과 만주국군 3천여 명의 병력이 벌이는 동계 토벌전을 경험한다. 연길현 유격대는 14일 동안 토벌대의 포위공격에 맞서 싸웠고 결국 포위망을 푸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에서 허성숙은 남성 전사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뛰어난 전투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중대의 기관총 사수가 되었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으로 사격술을 익혔고 마침내 동료들로부터 사격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36, 그녀는 중국공산당의 당원이 되었다.

19374, 허성숙의 남편 (항일연합군 제2군 제4[] 2중대장) 박광규(朴光奎)가 길림성 안도현(安圖縣)에서 작전 중 전사한다. 두 사람은 1년 전에 결혼했다. 결혼 후 1년 동안 두 사람은 같이 있는 날 보다 떨어져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극도의 비통에 빠진 허성숙은 심신이 허약해져 위기를 맞았으나 강인한 의지로 건강을 회복한다.

19397, 항일연합군 제2군 제4사와 제5사는 합병하여 항일연합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되고 허성숙은 제3방면군 제13연대 기관총분대 분대장이 된다. 같은 해 8, 3방면군은 안도현으로 이동하여 작전에 들어간다. 827, 한 밤중에 벌어진 전투에서 허성숙은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녀는 본대와 떨어져 은신하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된다.

허성숙은 적의 온갖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적은 그녀의 아버지 허기형(許基亨)을 데려와 그를 통해 투항을 권유하였으나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형장의 총구 앞에 섰고 미소를 지으며 최후를 맞았다. 그때 나이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그녀의 최후 모습에 관해서는 다르게 묘사한 기록도 있다. 다리와 복부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녀를 다음 날 한 한의사[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은 부상당한 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총알이 떨어지자 수류탄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허기형은 일제에 협력하는 조선인 자치 치안조직인 자위대의 대장이었다고 한다)

위에 소개한 얘기는 당 창건(19217) 10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당사연구실이 만주지역의 항일혁명열사의 행적을 정리한 책 붉은 길림: 승리로 이끈 100인의 행적”(红色吉林100个引人入胜的党史故事)에 실려 있다. 허성숙과 같은 삶을 살아온 조선인 혁명가는 숱하게 많다. 그들이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조국 조선의 독립이었다. 그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이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를 열람하면 허성숙의 이름은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이들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는 어디쯤일까?

#1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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