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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31) 뤼순(旅順)감옥

입력 : 2021-10-22 01:45:21
수정 : 2021-10-25 08:25:50

이해와 오해 (131)

 

뤼순(旅順)감옥

 

저술가 박종일

 

 

식민지시대에 서대문형무소(1908년 개소, 당시의 명칭은 경성감옥)에서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감금되고 처형되었다. 식민지 수도에 설치된 형무소였으니 많은 그곳에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감금되고 처형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서대문형무소에 버금가는 많은 숫자의 독립 운동가들이 감금되고 처형된 감옥이 중국 요녕성 뤼순감옥이다. 중국 대련시 역사박물관장 궈푸춘(郭富純)이 저술한 뤼순형무소실록”(2003년 출간)은 그런 상황을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1906(뤼순감옥은 1905년에 개소했다)~1936년 사이에 뤼순감옥에서 처형된 조선인은 12명이다. 같은 기간에 뤼순감옥에서 옥사한 조선인은 37명이다. 1936년 현재 뤼순감옥에 수감 중인 조선인은 441명이다. 이들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조선의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일운동에 매진한 수많은 중국인 애국자가 이곳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에 중국정부가 이곳을 애국교육기지로 지정해 놓은 점을 고려하면 뤼순감옥에서 처형되거나 복역한 조선인이 대부분 독립운동가라고 믿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행적이 알려져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은 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안중근(安重根, 1910년 사형)과 그의 공범들인 유동하(劉東夏, 16개월 복역), 조도선(曺道先, 16개월 복역 ), 우덕순(禹德淳, 3년 복역).

신채호(申采浩)는 독립운동단체의 활동경비를 마련하려 우편환을 위조했다가 체포된 후 1928년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6년에 옥사했다. 같은 사건으로 체포된 이필현(李弼鉉)은 사형 판결을 받고 1930년 처형되었다.

이회영(李會榮)은 관동군사령관 암살을 모의하다가 1932년 체포된 후 그해에 옥사했다.

최흥식(崔興植)은 관동군사령관과 남만주철도회사 고위층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1933년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뒤의 행적이 알 수 없다.

유상근(柳相根)은 최흥식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해방을 하루 앞 둔 1945814일에 옥중에서 일제에 의해 참살 당했다.

황덕환(黃德煥)은 만주지역의 친일 조선인을 처단해오다가 1928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옥 내 작업장에서 일본인 죄수를 살해하였고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9년 처형되었다.

채세윤(蔡世允)은 일찍이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1920년부터 무장투쟁에 참여해왔다. 1927년에 하얼빈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운반하던 중 체포된 후 10년 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김원국(金元國) 1920년대 중반 남만주지역에서 활발히 대일투쟁을 전개하던 정의부에서 1925년에 의용군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면서 통화현(通化縣) 일대의 친일조선인을 처단했다. 1927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 해에 처형되었다.

백여범(白汝範)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고 흥사단과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다롄(大連)에서 체포되어 뤼슌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손기업(孫基業), 이창룡(李昌龍), 박민항(朴敏杭)(손기업의 지휘 하에) 관동군 사령관 암살을 기도하다가 1933년에 체포되어 세 사람 모두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박민항은 고문후유증으로 그 해에 옥사하였고 손기업과 이창룡은 만기 출옥하였다.

궈푸춘의 저서에 따르면 뤼순감옥에서 (1906~36년 사이에) 사형당하거나 옥사한 조선인만 모두 49명이다.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연구가 조만간 성과를 내기를 기다린다.

 

#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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