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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22)  독립운동가 이춘실(李春實), 이화림으로 개명 - 이봉창, 윤봉길 의사 거사에 참여

입력 : 2021-01-28 05: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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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22) 

백발백중 저격수 독립운동가 이춘실(李春實)

저술가 박종일

 

그녀는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19193월에 오빠들과 함께 보통강변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가 객사했다. 스물두 살이던 1927년에 그녀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하며 지하활동을 하다가 그녀는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상해에 도착한 후 그녀는 인성학교(仁成學校; 상해의 조선교민학교. 후에 임시정부 산하의 학교로 개편된다) 교장 김두봉(金枓奉)의 소개로 김구가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애국단 내에서 그의 역할과 임무는 프랑스 조계지에 집을 정하고 가정주부로 위장하여 살면서 조선에서 건너오는 밀정들을 찾아내 처단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위장 가옥으로 유인되어온 밀정들을 김구가 교살할 때 그녀는 곁에서 김구를 직접 도왔다.

 

 

1931년 일본군이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193218일에 이봉창의사가 도쿄에서 훈도시속에 숨겨간 폭탄을 일왕을 향해 던졌으나 일왕은 화를 면했다. 같은 해 4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축하식이 열렸을 때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상해주둔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이 죽었다. 이봉창이 폭탄을 숨겼던 특제 훈도시를 만들었고, 홍구공원 거사 전에 윤봉길과 부부행세를 하며 현장을 사전 답사했던 여인이 이춘실이었다.

그녀는 다시 김두봉의 후원과 소개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군사학 공부를 하던 조선 청년이 다수 모여 있던 광동성 광주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중산대학 의학원의 견습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청강생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서 남편 김##도 만난다. 1935년에 그녀는 조선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한국독립당, 아메리카 대한독립당이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가입한다. 이 때 남편의 반대가 있자 이혼하고 갓 돌 지난 아이까지 포기한다. 민족혁명당에서는 박차정(朴次貞, 김원봉의 부인), 허정숙 등과 함께 부녀국 위원으로서 보건위생사업과 항일선전 활동을 하였다. 이어서 1938년에는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대원이 되었다. 의용대 주력은 태항산으로 옮겨가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하고 중국공산당 8로군 휘하에서 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그녀도 태항산에서 부녀대 부대장으로서 선전활동에 종사했다. 1943년 조선의용군 병력(3백명)은 팔로군과 함께 태항산에서 내려와 연안으로 퇴각하는데 이때 의용군 가운데 조선 여성은 그녀와 김화순 2명뿐이었다. 19451월 그녀는 의용군 지휘부의 지시로 나이를 여덟 살이나 줄이고 연안의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815일을 맞았다. 194611월에 그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녀는 항미원조전쟁(6.25전쟁) 기간 중에는 중공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야전의료 분야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국의 보건의료 분야에서 계속 일하다가 은퇴하였고 원로 홍군 휴양소에서 만년을 보냈다. 만년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혁명가로서의 생애는 내게 새 길도 열어주었지만 사생활에 아물지 못할 상처도 남겨주었다. 나의 아들(김우성金雨星)도 이제는 나처럼 노인이 되었을 텐데...” 그녀의 아들은 해방 후에 아버지를 따라 남조선(한국)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고 팔로군에 나간 어머니를 찾는다고 돌아다니다 상해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고 한다.

 

*이 글은 『당대중국조선족여걸』(민족출판사, 북경, 1991, pp.39-48)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박차정(1910-1944년 병사)은 독립유공자로서 포상(독립장, 1995))을 받았으나 같이 활동한 이춘실과 김원봉은 보훈처의 독립운동 포상자 명단에 나오지 않는다. 해방이후의 행적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곡절이 심한 한국의 현대사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조선족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서 한 인물을 기리고자 이 얘기를 끌어왔다.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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