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18]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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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18] 경신년(庚申年) 대토벌
저술가 박종일
경신참변 - 출처 KBS
1919년 3월 1일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1919년 3월 13일에 연변 용정에서 서울의 만세운동을 성원하는 조선족 반일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족 집거지역(연길, 화룡, 왕청, 훈춘, 유하, 통화, 장백, 집안, 환인, 관전 현)에서 4월 22일까지 이어진 시위활동에서 20여명이 일본경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3.13만세운동을 계기로 만주 일대의 조선인 항일 무장집단이 전열을 정비하거나 새로운 무장집단이 생겨났다. 1911년에 의병대를 거느리고 중국 경내로 들어와 전전하던 홍범도 부대는 이때 안도현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최명록(최진동)은 3.13운동 후에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군무도독부』를 세웠다. 1919년 10월 왕청에서 『북로군정서』가 세워졌다(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왕청현에서는 또 이범윤이 『광복단』을 세웠다. 국민회에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사령관 안 무). 1920년 5월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명록의 『대한군무도독부가 『북로독군부』로 통합된다(부장 최명록, 부관 안 무, 사령관 홍범도, 사령관 부관 주 건). 1919년 11월에 유하현에서 한족회(韓族會) 군사부를 토대로 하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을 주력으로 하여 『서로군정서』가 세워졌다(독판 이상룡). 같은 유하현에서 1919년 4월에 『대한독립단』이 세워졌다(총재 박장호)
경신참변 삼광작전
1920년 6월 홍범도 지휘하의 북로독군부와 신민단 등 항일 부대들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부대를 섬멸했다. 봉오동에 주둔해있던 항일 무장부대의 한 개 분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경 초소를 습격하고 돌아올 때 이를 추격한 일본군 부대와 벌인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0여 명이 전사했다. 봉오동전투는 조선족 항일무장부대가 중국경내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첫 전투이자 3.1만세운동 다음 해의 승리였기 때문에 조선인의 자긍심을 크게 높여주었다.
일본군은 만주일대 조선족 항일무장 세력을 철저히 타격하기 『훈춘사건』을 조작한다. 1920년 9월 일본군은 친일 마적집단을 사주하여 훈춘 일본영사관 분관을 공격하게 하고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족 항일무장단체에게 돌렸다. 1920년(경신년) 10월에 연변에 출병한 일본군은 조선족 거주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실행한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항일 무장부대가 일본군의 “경신년대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맞서 벌인 전투였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을 포함하여 수백 명이 전사하고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항일 무장부대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전투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신년대토벌”작전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토벌”작전은 일본군 19사단 사단장 다카지마 중장이 총지휘하고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1, 13, 14사단과 중국 동북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일부가 참여했다. 조선족 부락을 포위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는 사람은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19사단의 한 부대는 왕청현의 조선족 마을에 이르러 체포한 조선족들의 코를 쇠줄로 꿰고 5킬로미터 남짓 거리를 끌도 다닌 후 총살하였다. 화룡현 청산리 일대를 “토벌”하던 19사단의 다른 한 부대는 1,000여 세대의 조선족 가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9사단의 또 한 부대는 용정 장암동에서 농가 26채를 불태우고 촌민 145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두만강 남안의 무산, 회령, 종성 등지의 일본 헌병대와 국경수비대도 “토벌대”와 협동작전으로 강을 건너와 조선족 마을을 유린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훈춘, 연길, 화룡, 왕청 4개 현에서 일본군은 조선족 3,500여 명을 살해하였고 5,058명을 체포하였으며, 가옥 2,500여 채와 학교 30여 개소를 불태웠다. 그 밖의 연변지역 4개 현과, 동녕현 등 5개현에서 불에 탄 가옥(조선족, 만주족 포함)이 279채, 학교가 4개소였다.
10월이면 “경신대토벌”이 있은 지 꼭 백 년째 되는 해이다. 지금 우리 곁에 와있는 조선족 동포들은 이런 역사적 영광과 고난을 함께한 우리 선조들의 후손들이다.
#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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