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116] 부처 머리 훔쳐 팔아 거부가 되었다가 부처그림 때문에 죽은 악빈(岳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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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116]
부처 머리 훔쳐 팔아 거부가 되었다가 부처그림 때문에 죽은 악빈(岳彬)
박종일
낙양 용문석굴의 잘려진 불상
서울에는 인사동이 있고 북경에는 유리창(琉璃廠)이 있다. 유리창은 유리 만드는 공장이란 뜻이다. 원(元)나라 때에 이곳에 궁중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세워졌고 주로 유리기와를 생산했기에 유리창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명(明)나라 때에 도시가 확장되면서 이곳은 시내가 되었고, 관요는 외곽으로 이전했으나 지명은 그대로 남았다. 청(淸)나라 때부터 이곳에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들을 따라 책, 서화, 문방사우를 파는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는 이때 생겨났다.
민국(民國)시기(신해혁명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까지)에 유리창에서 활약한 거물급 골동상 가운데 악빈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 인물은 부처 머리를 훔쳐 팔아서 거부가 되었다가 부처그림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외국인을 상대로 용문(龍門)석굴과 운강(雲崗)석굴에서 잘라온 불상의 머리를 팔아 돈과 명성을 얻었다. 그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외국인 고객의 주문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조각 장인을 불러 모아 불상의 머리와 목각 불상을 만들었다. 복제품을 속여 파는 것이 주업이 되었다.
용문석굴은 하남성 낙양(洛陽)시 외곽에 있으며 북위(北魏)시대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조성되었다. 악빈은 이 석굴의 걸작 가운데 북위 효문제의 예불행렬을 묘사한 『제후예불도』와 황태후의 예불행렬을 묘사한 『황태후예불도』란 부조 작품을 미국인에게 팔았다. 그는 앨런 프리스트(Allan Priest, 훗날 뉴욕시 예술박물관 동양부 주임)로부터 선금을 받고 당시 낙양을 지배하던 군벌에게 뇌물을 주고 5년에 걸쳐 부조작품을 뜯어냈다. 1930년대의 일이다. 『제후예불도』는 현재 뉴욕시 예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황태후예불도』는 캔저스시티 넬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운강석굴은 산서성 대동(大同)시 교외에 있으며 북위시대에 조성되었다. 악빈은 이곳 불상 머리의 모조품을 만들고 운강석굴에서 나온 진품이라 속여 1933년에 미국의 석유재벌에게 팔았다(일설에는 록펠러 가문이라고는 하나 사간 사람이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이 석유재벌이 친지들을 초대하여 불상의 머리를 보여주고 자랑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운강석굴에 원본이 아직 남아있다고 알려주었다. 석유재벌이 악빈에게 전보를 보내 환불을 요구했다. 악빈은 군벌에게 뇌물을 주고 운강석굴의 원본 석불을 파괴했다. 그런 다음 미국의 석유재벌에게는 원작이 남아있다면 배상하고 처벌도 감수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예훼손의 책임을 지라는 전보를 보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 들어섰다. 『제후예불도』와 『황태후예불도』 사건이 드러났다. 뜯어낸 부조가운데 재접합에 실패하여 버린 작품이 다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52년, 악빈은 감옥 안에서 멸시와 천대 속에 숨을 거두었다.
혹 운강이나 용문을 관광하는 기회가 있으면 여기저기 파손된 석굴을 살펴보고 악빈을 기억해주기 바란다(20여 년 전, 길림성 통화(通化)현 일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뜯어내서 서울의 골동상에게 판 범인이 중벌을 받는 사건이 중국에서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 벽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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