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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93] 조선의 노먼 베쑨, 방우용

입력 : 2018-08-29 17:57:36
수정 : 2018-09-27 21:22:33

이해와 오해 [93]

 

조선의 노먼 베쑨,  방우용(方禹鏞)

박종일

 

 

추위가 찾아온 뒤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마지막에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이것은 조선독립동맹원이던 방우용(1893~1956?)5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모택동이 그를 위해 써준 글씨이다. 당시 연안에 머물고 있던 저명한 화가 강풍(江豊)은 약초를 구하러 산에 오른 편작(扁鵲)의 모습으로 방우용의 초상을 그려주었다. 그 무렵 방우용은 연안 화평(和平)의원 내과 주임으로서 오늘날의 편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화평의원은 중국공산당을 지원하다 전장에서 숨진 캐나다인 의사 노만 베쑨(1890-1939)을 기념하여 중국공산당이 연안에 세운 병원이다.

방우용은 경남 언양에서 태어났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가르쳤다고 한다. 청년시절부터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에 원한을 품고 있어서 각종 반일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8,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당 군대에 들어가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1939, 연안으로 들어가 항일전쟁이 끝날 때(1945)까지 화평의원 내과 주임을 맡았다. 그는 섬서·감숙·녕하 변구(邊區, 공산당 지배지역)의 위생개선 사업에도 크게 공헌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그의 50회 생일을 맞아 사설(1943215일치)을 통해 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대의를 위해 싸우다 다친 많은 혁명동지들은 그로부터 상처를 치료받았다. 현재 전선에서 치료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많은 젊은 의사들은 그로부터 교육받았다. 그와 함께 일한 동지들은 모두가 그의 세심한 배려와 헌신과 사랑의 정신에 존경을 표시한다. 화평의원에서 휴양한 적이 있는 혁명동지들은 한결같이 그의 보살핌에 감사한다. 반백년의 나이에도 그의 신체는 여전히 건강하며 진보를 향한 그의 신념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혁명을 위해 크게 공헌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장래에도 우리 변구의 의료계 인사들은 모두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의학계의 선배로서 방우용은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그는 늘 겸손했다. “나를 손님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기꺼이 지적해주십시오. 그것이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매년 겨울철이 돌아오면 방우용 부부는 조선식 김치를 담가 병원직원은 물론 치료받는 시민과 병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병원 식구들은 그에게 엄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병원 직원들이 모택동에게 축하글씨를 써달라고 청원하였고 모택동은 기꺼이 응했다.

방우용은 조선독립동맹 당원으로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을 위해서도 헌신했고 동시에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에도 헌신했다. 19459, 방우용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인 언양이 아니라 북으로 갔다. 북한 정권 초기에 그는 검열국 검열위원을 맡았지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검열국장은 옌안에서 같이 활동한 최창익(崔昌益)이었다. 연안파 최창익은 만주파 김일성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숙청된다. 이때 방우용도 함께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안파가 주축이었던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남침부대의 주력을 이뤘다. 남쪽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존재다. 방우용이 조선독립동맹 소속인 것은 분명하지만 의사였던 그가 조선의용군 소속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방우용의 흔적은 북한, 남한, 중국에서 차례차례 지워진다. 만주파가 연안파를 숙청한 뒤 북한 역사에서 연안파는 삭제된다. 한국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거부된다. 중국 역시 혁명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이 아닌 조선인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금 연안 화평의원 기념관에는 방우용이 귀국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 한 장만 전시되어 있다.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설명도 없이.

분단의 세월이 거의 한 세기를 채워간다. 이제는 최소한 독립운동 사적(史蹟)만이라도 이념의 올가미를 벗겨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73번째의 광복절을 앞두고 생각해본다.

 

 

 

사진 설명 :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꿈꿨던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방우용. 그는 중국 공산당 근거지가 있던 중국 산시성 옌안 백구은(베쑨)국제화평의원에서 6년간 내과주임으로 일한 뒤 194511월 북한으로 귀국한다. 당시 방우용의 환송 사진(앞줄 앉은 사람 오른쪽에서 네 번째). 방우용 오른쪽에 앉은 이는 아내 이덕신. 앞에 세운 아이는 부부의 아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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