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91] 장자못 전설
수정 : 2019-11-18 06:48:19
이해와 오해 [91]
장자못 전설
박종일
우리고장 적성면 장좌리에 장자못이란 연못이 있다. 장자(長者)란 예부터 큰 부자를 점잖게 부르는 말이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이 못은 원래 송(宋)씨 성의 큰 부자가 살았던 집터라고 한다. 송부자는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색하기가 그지없는데다 교만스럽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가난한 이웃에게 매정함은 물론이고 탁발승이 시주를 청해도 쌀 한 톨 시주하는 경우가 없었다. 어느 날 스님이 찾아와 송부자에게 시주를 청하였으나 예와 같이 거절하면서 외양간에서 말똥을 퍼내 와서는 스님의 바랑에 부어 넣었다. 부엌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송부자의 착한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스님에게 쌀 한말을 담아주면서 “시아버지 포학한 행위를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 하나만 챙겨서 빨리 나를 따라 오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말하며 고랑포 쪽을 향해 앞서갔다. 며느리는 소중히 여기는 베틀을 이고서 스님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임진강가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났다. 놀란 며느리는 스님의 당부 말을 잊고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화석이 되고 말았다. 송부자집이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큰 연못으로 변했다.
성서(구약: 창세기)에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두 도시국가의 멸망에 관한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족장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소돔으로 이주했으나, 소돔과 고모라가 워낙 타락한 탓에 신은 아브라함에게 두 도시를 파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신에게 만약 그곳에서 열 명의 의인을 찾을 수 있다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신은 파괴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의인은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결국 신은 두 도시를 파괴하기로 마음먹고 그 전에 (사람의 모습을 취한) 천사 둘을 미리 보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게 했다. 밤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두 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소돔 사람들은 두 손님과 섹스를 원했던 것이다. 손님들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롯과 가족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시를 떠나라고 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으로 변한다. 신은 두 도시를 불과 유황으로 파괴했다.
종교적 연관성도 없고, 지리적 근접성도 없고, 시대적으로 계승관계에 있지도 않은 한국과 팔레스타인에서 유사한 줄거리의 전설이 형성된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두 얘기는 우리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절실한 교훈을 제시한다. 첫째, 인간은 물질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면 타락하고 포학해진다. 둘째, 타락한 사회는 선량하고 의로운 소수의 노력으로는 교정되지 않으며 절대자로부터 징벌을 받게 된다. 셋째, 선량하고 의로운 소수는 결국 화석으로 남는다. (화석이 되더라도 변화와 개선은 시도해야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으면 우리 삶의 가치는 너무 보잘 것 없어질 터이니까.)
고랑포 나루에는 오랜 세월동안 베틀을 머리에 인 여인의 나무 조각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조각상의 모습은 재봉틀을 머리에 인 여인으로 바뀌었고 아래 고랑포 정미소 마당에 최근(1991년)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파주단오제] 자료. 1991년, 추진위원회 편찬). 그런데, 남북한을 통 털어 전국 100여 곳에 줄거리가 흡사하고 심지어는 이름까지 동일한 ‘장자못’ 전설이 퍼져있다고 한다.
남색(男色), 혹은 수간(獸姦)을 뜻하는 영어 어휘 sodomy의 어원은 소돔이다. 성서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악이 지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의미로 두루 사용된다. 신약성서의 베드로후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이 도시를 파멸로 이끌어갔다고 말한다. 타락한 로마제국의 도시에 살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을 롯에 비유하면서 의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의롭게 살고자 애썼다. (그런 전통은 지금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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