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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89]‘누가 먼저 중국인 백명의 목을 베냐’ 살인시합(百人斬)  

입력 : 2018-06-15 14:07:02
수정 : 2019-11-18 06:48:58

누가 먼저 중국인 백명의 목을 베냐살인시합(百人斬)

 

박종일

 

백인참은 남경으로 진공해가던 일본군 부대의 장교 두 명(향정민명向井敏明소위, 야전의野田毅소위)이 누가 먼저 중국인 백 명의 목을 베는지를 두고 193711월 말부터 1210일 사이에 벌인 살인시합을 말한다. 이 시합의 승자는 한 명 더 많은 106명의 목을 벤 향정민명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동경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법정에 중국대표로 참가한 고문빈高文彬이 우연히 관련 신문보도를 발견하고 남경에 알렸다. 두 명의 장교는 중국으로 인도되어 남경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1948128일에 남경 우화대(雨花臺) 형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동경일일신문(매일신문每日新聞의 전신)의 종군기자 네 명이 두 사람의 시합 경과를 뒤따라가며 사진까지 곁들여 연속적으로 보도했다. 19371130일자 첫 번째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29일 상주常州): ‘백인참 시합!’ 두 소위 80명 기록을 눈앞에 두다. 최전선에 배치된 청년장교 두 명이 백인참 시합을 시작했다. 무석無錫을 출발한 뒤 곧바로 한 사람이 56명을 베었고 다른 한 사람은 25명을 베었다. 향정 소위(26, 검도 3)는 산구현山口縣 출신이고 야전 소위(25)는 녹아도현鹿児島縣 출신이다. 무석을 출발한 다음날 아침 야전 소위는 무석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한 촌락에서 먼저 4명의 적을 베어 기선을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향정 소위도 분발하여 그날 저녁 횡림진橫林鎭을 습격하여 부하와 함께 적 55명을 베었다.” 19371213일자 동경일일신문의 제4보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백인참기록 초과! 향정 106 : 야전 105, 두 소위 연장전에 들어가기로 약속.” 그리고 이 날자 기사에는 군도를 짚고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두 경쟁자의 사진이 실렸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정세는 바뀌어 전시에는 반파시즘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소련과 맞서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를 철저히 청산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동경전범재판은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엄격한 증거를 요구했다. 전승국이자 일본 만행의 최대 피해자였던 중국은 국공내전에 휘말린 상황이라 일본군의 온갖 만행을 입증할 증거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향정과 야전은 남경전범재판에서 우리는 귀국해서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의 전공을 과장했다고 변명했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이 재판의 경과는 일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1971년에 조일신문(朝日新聞)의 본다승일(本多勝一) 기자가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이 재판에 관해 취재하고 그해 8월에서 12월 사이에 중국여행(中國之旅)’란 제목으로 연속 보도했다. 20058월에 향정과 야전의 후손들-향정천혜자(向井天惠子)와 야전마살(野田馬薩)-이 본다 기자의 보도가 허위라며 고소했다. 허위란 주장의 요지는 전선에 가있던 청년장교들의 농담을 진실인 것처럼 기사화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일본 신문들은 백 명의 목을 자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일본도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20065월 동경지방법원은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남경대학살기념관(정식명칭은 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 관장 주성산(朱成山)“‘백인참의 본질은 한 자루의 칼을 사용했느냐, 칼과 총을 함께 사용했느냐가 아니다. 백 명이 넘는 포로와 민간인을 재미삼아 학살한 비인도적 행위가 일본 침략자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

이밖에도 일본군 제6사단 대위 전중군길(田中軍吉)이 혼자서 중국인 300명의 목을 벤 사건도 있었다. ‘백인참은 남경대학살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일본은 남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남경대학살 기념관 뜰에는 30만이란 숫자를 새겨놓은 높은 탑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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