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88]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쓰지 않았다.
수정 : 2019-11-18 06:49:38
이해와 오해 88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쓰지 않았다.
박종일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기록적인 숫자의 관객을 모았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자신의 부모님이 흥남 철수작전 때에 피난 나온 실향민이라고 연설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6.25전쟁 때 중공군이 개입한 장전호 전투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이 전투는 미군이 현대에 경험한 몇 되지 않는 패전의 기록이다. 몇 년 전에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에는 중공군이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공격해오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패배한 중요한 원인은 중공군의 인해전술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 측에서는 공산당 군대가 인해전술을 쓴다고 악선전을 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 지도부와 미국의 언론매체가 똑같은 주장을 확산시켰다. 인해전술은 “공격을 받는 쪽에서 화력으로 공격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엄호나 위장이 없이) 대량의 보병병력을 동원하여 밀집대형으로 적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전술”로 정의 할 수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전술이며, 화력이 부족하면서 병력이 엄청나게 많은 나라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이다. 당시 중국은 후진국이며 인구대국이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이 인해전술을 사용했다는 주장은 논리를 뛰어넘어 강력한 심리적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중공군은 인해전술을 쓰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 처음으로 조우한 중공군은 미군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전투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군이 가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 존재했다. 그리고 기습해왔다. 보유한 장비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중공군은 기습해왔다. 미군(한국군을 포함하여)은 대응할 수 있는 전술을 찾아낼 수가 없어 파죽지세로 흥남까지 밀렸고 그곳에서 탈출했다. 미군 지휘부는 패배의 원인을 호도하기 위해 “인해전술”을 찾아냈고 언론은 이를 확산시켰다.
홍군(紅軍, 국공내전시기 공산당 군대의 명칭)은 병력수와 화력 면에서 국민당 군대에 비해 절대 열세였다. 홍군이 국민당 군의 포위 섬멸작전을 뚫고서 살아남은 과정이 ‘장정(長征)’이다. 홍군은 살아남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행군하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아무런 장비도 없이 이겨내고, 달아나는 도중에도 적의 틈만 있으면 기습했다. 어떤 서양의 군사학자는 홍군의 장정은 한니발의 알프스 산 넘기보다 더 위대한 군사 업적이라고 평한다. 장정을 통해 홍군의 전술이 다듬어지고 조직이 형성되었다. 그 홍군이 중공정권 수립 후 그대로 중공군(인민해방군)이 되었고 정권수립 1년 만에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맞닥뜨렸다.
미군이 후퇴하면 중공군은 잇달아 추격해오는 정도가 아니라 미군보다 앞쪽에 가있었다. 미군이 험악한 자연조건이라 군대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건에서 중공군은 나타나고 공격해왔다. 미군이 보기에 중공군은 바닷물처럼 많았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효과적인 대응전술을 찾아내지 못한 미군 지휘관들은 엄청난 수의 중공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한국전쟁의 전술적 교훈을 정리한 미국 육군대학의 한 군사학자(S.L.A. Marshall 준장)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중국군의 공격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그들의 화력은 미군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나 박격포 포격만은 놀랄 정도로 정확했다. 특히 경기관총과 중기관총의 배치는 매우 정교했고 사격솜씨도 뛰어났다.”
참고로, 중공군의 참전 당시 병력은 26만이었고 대적한 연합군은 42만이었다.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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