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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 되새기기] 한계 없는 진실을 품은 명작 『모비 딕』

입력 : 2021-03-15 09:35:46
수정 : 0000-00-00 00:00:00

[지난 책 되새기기]

 

한계 없는 진실을 품은 명작

모비 딕(허먼 멜빌 지음, 록웰 켄트 그림,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떠나고 싶었다. 코로나와 벌이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뒤로 한 채 여행가방에 셔츠 한두 장을 쑤셔넣고는 저 먼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행 대신 책을, 그러나 책장을 펼치면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져 내 영혼을 통째로 집어 삼킬 레전드급 고전 소설을 찾았다. 928쪽짜리 벽돌책모비 딕을 한 달 동안 출퇴근 전철에서 읽었다.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는 첫 문장은 작가의 패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이슈미얼은 아브라함의 맏아들이었지만 여종의 아들이기도 했다. 부인이 아들 이사악을 낳자 황야로 추방되어 죽음의 위기를 맞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후에 아랍인의 조상이 됐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백인 중심 기독교 우월주의를 개나 줘버리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역은 에이헤브 선장이다. 흰 고래 모비 딕에게 잃은 한 쪽 다리를 고래뼈 의족으로 지탱하며 복수심에 불타 모비 딕을 쫓는 이유를 에이헤브 선장은 이렇게 외친다.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 무슨 수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나? 나에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그 벽이다. (중략) 태양이 날 모욕한다면 그 태양도 찔러줄 테니까. (중략) 날 지배하는 건 누굴까? 진실에 한계는 없어’ (270-271)

 

신체장애와 암투병을 이겨내고 명수필가이며 영문학자로 살았던 장영희 교수는 스무살에 처음으로모비 딕을 읽으며 자유를 찾아 운명에 도전하는 에이헤브 선장의 모습에서 영혼의 지표를 발견했노라 수차례 고백했다.

 

허먼 멜빌은 유년 시절 아버지를 잃고 독실한 퀘이커교도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 때문에 이십대에 포경선을 탔다가 식인종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다. 삶과 죽음,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체험을 소설모비 딕에 녹여냈고 한계 없는 진실을 품은 명작으로 당당히 평가받고 있다. 삽화도 소설만큼이나 강렬하고, 황유원 시인의 번역도 매끄럽다.

 

유형선 (‘1 독서습관저자)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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