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례, 그를 읽고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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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 년 동안의 여성계의 성장은 한국여성의 사회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십 년 전만해도 여성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과거 십 년 동안은 한국 여성계의 ‘유아기’라 할 수 있었습니다. 향후 십 년 동안은 어떤 성장 가능성이 그 앞에 놓여 있을까요?”
—김필례, 「지난 십 년 동안의 한국여성의 발전(The Development of Korean Women during the Past Ten Years)」(1923, 원문 영어) 중에서.
여성 교육과 조국의 독립,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한 김필례(金弼禮, 1891-1983). 그가 1920년대 초 던졌던 이 물음을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던져 본다. 물론 일제강점기였던 그때와는 정치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다르고, 남녀의 동등한 교육 기회, 가부장 사회의 잔재였던 불합리한 제도 개선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드러난 사건들과 페미니즘 운동을 볼 때, 제도 밖 실생활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여전히 바뀌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이러한 시점에 여성 교육자 김필례의 평전과 그가 직접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의 출간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의 글을 읽노라면 이미 우리가 극복한 과제들도 있고, 지금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도 허다하다. 그러나 사람은 시대를 벗어나 살 수 없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부터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김필례는 그 시대 여성에게 시급한 대안을 제시한 실천적 활동가였고, 그런 점에서 그의 행보는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조국의 독립,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배움의 길
김필례가 태어난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의 야욕이 팽배해 있던 시기로, 조선 정부와 미국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조선에 종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등 새로운 문화를 소개했다. 김필례가 성장한 황해도 장연 소래마을은 그의 집안인 광산 김씨 집성촌으로, 기독교와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어서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주의적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 부설 신식학교 ‘금세학교(金世學校)’, 일명 소래학교에서 교육받은 김필례는 1903년 서울에 있는 정신여학교(당시 연동여학교)에 입학해 1907년 제1회로 졸업한다.
애국계몽단체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해 이끌고 항일구국의 활동을 한 김윤오(金允五), 세브란스병원에서 양의사로 일하다가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북만주로 망명, 이상촌을 이루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필순(金弼淳). 이 둘은 김필례의 오빠들로, 이런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언니 김구례(金求禮), 김순애(金淳愛), 조카 김마리아(金瑪利亞) 자매들과 함께 그 역시 전통적 여성의 삶보다는 새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 있는 독립적 삶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배운 만큼 여성 교육을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게 된다.
정신여학교 졸업 후 잠시 모교에서 교편을 잡던 김필례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무력충돌 발생하자 오빠 김필순을 도와 세브란스병원에서 부상병을 간호하는데, 이 끔찍한 현장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계기로 유학을 결심한다. 마침 최초의 관비유학생 자격이 주어지고 동경의 여자학원(女子學院)으로 가 역사를 전공한다.
“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었나, 그들은 작은 섬나라 왜인이지만 무혈전쟁으로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왜 크나큰 다툼 없이 남의 보호를 받게 되었나 (…) 필경은 국민성이 다르기 때문에 또는 국민성이 개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조국은 뼈아픈 곤욕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국민성은 어떤 것일까, 연구해보고 싶었다. 연구해보고 좋은 점, 훌륭한 점이 있으면 모조리 가져오고 싶었다. 배워오고 싶었다. 거기엔 역사의 연구가 첩경인 것 같았다.”
—김필례, 「이상을 향하여 다름질쳤던 격동의 시대」(1973) 중에서.
1915년 동경여자유학생이 모여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김필례를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이는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라 한국여성계의 광명이 되어 스웨덴의 여성해방론자 엘렌 케이(Ellen Key)와 같은 이상적 부인의 삶을 창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가 귀국한 후에는 여자학원에서 함께 유학 중이던 조카 김마리아가 회장직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 교양잡지 『여자계』(1917년 12월 창간)를 출간하기도 한다.
광주와 서울에서 이룬 여성 교육의 기틀
8년 후인 1916년 귀국한 그는 1918년 의사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여 시댁이 있는 광주로 내려와서 살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김필례의 광주와의 인연은 1947년 서울 정신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까지 삼십여 년 지속된다. 광주에 살면서 여성들이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우선 광주 여성들의 계몽에 심혈을 기울인다. 광주 YWCA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더욱 활발하게 펼치기 시작, 1922년에는 김활란과 함께 세계기독학생대회에 참가해 한국 YWCA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김필례가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다시 가게 된 것은 해방이 되고 난 후 1947년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과 일본이 적이 되자 학교를 경영하던 미국 선교사들은 강제로 출국당하고, 결정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강제 폐교를 당했었다. 복교를 위한 가장 적합한 인물로 김필례가 추대되어, 1947년 7월 12일 정부로부터 재인가를 받고 제12대 교장이 된다. 언니 김순애와 형부 김규식 박사 내외가 학교 운영의 첫해 경비를 지원하는 등 여러 도움과 갖은 노력으로 학교를 재건하고, 우리나라 여성 교육 기관으로서의 튼실한 기틀을 이루어낸다. 또한 교장직을 사임하던 1961년에는 오랜 숙원이던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가 YWCA 창설에 애쓴 것도, 바로 암매한 우리의 여성사회를 깨우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여성사회 단체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수피아여학교, 정신여학교를 위해 헌신하고 서울여대 건립을 위해 애쓴 것도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결과다. 이처럼 김필례는 아는 것은 몸소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은 앎은 앎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선 세대의 기록을 다시 읽는다는 것
그러나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운 순간과 마주하게도 된다. 신식 교육을 받은 맹렬한 활동가임에도 여전히 가정에 충실한 여성이길 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필례는 언제나 ‘배운 만큼 달라야 하고 믿는 만큼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당시 지배적이던 보수와 전통의 잣대에서도 확실히 인정받는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선택적 해법이었다. 그의 진심은 1930년대에 쓴 『성교육』에 잘 드러난다. 여성의 일방적 의무만 강조하리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인생의 각 단계에서 만나는 문제를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하고 개인의 이상을 실현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언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세기, 쉽지 않은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열정이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처음 나오는 「쉼 없는 열정: 나라, 신앙, 교육을 향한 김필례의 삶」은 이정숙이 새롭게 쓴 선생의 평전으로, 가장 최신의 연구까지 망라하고 관련 사진자료를 함께 편집했다. 두번째 ‘김필례를 읽다’는 선생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기독교, 교육, 여성 관련 글을 모아 엮은 것으로, 삼십대 초반이던 1920년대부터 팔십대 후반인 1970년대까지의 글이 실려 있다. 세번째 ‘김필례를 기억하다’에는 선생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지난날 남긴 글 또는 새로 쓴 글을 한자리에 모았다. 여성 활동가로서의 면모, 제자들의 추억, 가족들의 그리움 들이 담겨 있다. 네번째 ‘특별기고’편에는 김필례의 언니 김구례의 손자 서원석이 쓴 「광산 김씨 문중의 이야기」와 차종순의 「김필례의 광주 시절」이 선생의 집안과 한 시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부록’편에는 선생의 삶을 보다 상세히 복원하는 자료들을 모았다. ‘시대가 기록한 김필례’는 선생의 활동 및 행적을 기록한 다른 이들의 글 중 그의 저술을 보완할 수 있는 것들을 엮었고, 김필례가 쓴 『성교육(性敎育)』(조선예수교서회, 1935)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전체 영인해 수록했다. 그밖에 영문과 일문으로 쓴 글 원문, 연보, 참고문헌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열화당 영혼도서관’ 시리즈로 출간되었는데, 이 시리즈는 삶을 기록하여 보존함으로써 한 인간의 생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후대들이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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