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53] 자유와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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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갖지 않았던 사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노예가 있는 사회와 노예를 기반으로 한 사회는 다르다.
전자에서는 노예의 수도 적었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작용도 크지 않았다. 후자를 마르크스는 노예제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는데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노예의 숫자도 많았고 그들의 생산이 통치계급의 직접 수입이었다.
세계사에서는 노예를 기반으로 한 사회가 다섯 개 나타난다.
두 개−아테네를 위시한 그리스 도시국가(스파르타 제외), 로마통치하의 이탈리아와 골과 스페인(로마 제국 전체가 아님)−는 고대에 존재했고, 세 개−내전 이전의 미합중국, 스페인의 카리브해 식민지, 포르투갈 통치하의 브라질−는 현대까지 존재했다.
이들 사회에서는 노예의 숫자가 한창 때에는 전체인구의 1/3을 넘었다.
아테네와 미국은 자유와 민주의 간판스타이고 로마공화국은 완전한 민주사회는 아니었지만 자유를 표방했다.
시민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던 도시국가가 바로 노예가 넘쳐나는 사회였고 대표적인 예가 아테네이다.
노예를 기반으로 한 다섯 개의 사회 가운데서 로마가 규모가 제일 컸다.
로마법의 대부분은 노예문제에 관한 것이다.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재산은 사회경제적으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산도구였다.
“자유라는 개념은 노예경제의 발전 덕분에 생겨났다.” 로마에서는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은 노예와 대칭되는 법적지위였다.
노예가 경작을 담당함으로써 자유 소농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고 귀족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되었고 권모술수를 통해 공공의 사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스•로마에서는 정치적 자유가 노예제와 함께 발전해갔다.
민주의 선봉에 섰던 나라들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협상을 중시하고 피차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는 가치와 제도를 수립할 수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는 외부인을 대량으로 잡아와 노예로 만들고 불평등과 부자유를 노예에게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노예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노예제의 당연성을 강변하는 정교한 논리의 개발이 필요했다. 그리스의 시인 유리피데스는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인은 야만인을 통치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야만인은 그리스를 통치할 수 없으며 그들은 태생적인 노예이다. 자유는 우리 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다.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태어난다. 후자에게 노예제는 유익할 뿐만 아니라 정의(正義)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인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라는 개념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자유의 이름으로 부자유를 강요하고 있지 않은지 늘 살펴볼 일이다.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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