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54] 중국의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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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낙연(韓樂然: 1896~1947)은 길림성 연길현(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장 먼저 입당한 조선인이었고 동북지역 공산당 창건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전화국 교환원, 세관직원으로 일하다가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민족문제와 혁명이념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20년에 상해로 가 상해미술전과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 전문적인 회화교육을 받았다. 1923년에는 소주 일대를 여행한 스케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진보적인 미술가란 평판을 얻었다. 1922년에 채화삼(蔡和森, 중국공산당 창당멤버이자 모택동의 장사사범학교 동기동창)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아 1923년 말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의 지시에 따라 1924년에 동북지역으로 돌아와 그곳에 지하당을 건립하는 일에 매진했다.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사립미술학교를 세우고 이 학교의 교수 신분으로서 지하당을 구축하는 한편 국민당 외곽단체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신분을 위장했다. 1925년에 하얼빈으로 옮겨가 중학교 미술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뛰어난 그림실력으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고 대중을 상대로 한 미술운동을 펼침으로서 사회적 명사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다수의 지식 청년들과 저명인사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다.
공산당 지도부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1928년 말 러시아로 건너가 공부한 후 다시 프랑스, 영국, 스위스, 네델란드,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937년 귀국한 후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돈황석굴의 발굴과 보호 작업에 헌신했다.
1946~1947년에는 신강 지역의 석굴벽화를 촬영하고 모사하는 일에 매달렸다. 중국 예술가 가운데서 중국 고대예술의 보물창고라고 불리는 키질 천불동 벽화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중국 서북지역의 풍광과 인물과 문물을 현대적 화법으로 묘사한 작품을 대량으로 남겼는데 당대의 평자들로부터 “중국의 피카소”란 별칭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문화와 예술을 접목시켰고 회화와 고고학을 융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남긴 대량의 사진작품과 회화작품은 중국내 여러 미술관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다. 1947년 7월, 신강지역 답사를 마친 후 우루무치에서 난주로 돌아오는 국민당 군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사망했다.
식민지 시대에 중국대륙에서 음악과 영화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인은 더러 알려져 있으나 미술 분야에서 활동한 한낙연의 공적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얘기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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