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파주의 발자취를 밟으며 (1) 강화도 돈대 사례를 살펴 장산진 돈대를 복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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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파주의 발자취를 밟으며 (1)
강화도 돈대 사례를 살펴 장산진 돈대를 복원하자!
문화재청 전 문화재전문위원 노영대
<편집자주> 이 글은 전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노영대씨가 파주 장산진의 돈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시급히 해야한다는 기고문이다. 그는 장산진 8개 돈대, 래소정, 장암에 이어 진서문, 그리고 ‘화석정’(花石亭), 영월정, 칠송정 등이 구슬처럼 꿰어서 파주의 고부가가치의 역사문화유적콘텐츠로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를 2회에 나누어 지면에 실어 장산진 돈대 복원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
삼국시대 이래 역사적 방어진지
장산진 돈대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산 7-1번지 일대에 있다. 임진강이 흐르고 바로 앞 초평도가 위치하고 있다. 야산 능선 약 2km에 이르는 장산진 8개 돈대는 도성의 방어를 위해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 나라가 직접 관리했던 지역이다.
더 올라가면,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또는 신라가 덕진산성과 장산진 돈대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지켰을 것이다(최근 정확한 학술발굴 자료는 없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장산진 돈대는 영조30년(1754)에 설치되었다. 제1돈대는 가장 가까운 장산나루에 인접하고, 제8돈대는 약 2km쯤 떨어진 임진나루(임진도)에 있었다. 능선 정상부는 해발 38m정도로 임진강과 주변의 충적평야를 관측하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장산진 돈대는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최적지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영조 30년에 설치된 장산진 돈대
조선시대 연산군 때는 임진강 방어체계를 강조했고, 숙종 때는 임진나루 및 관청 소유의 선박인 관선(官船) 관리를 맡던 도승을 별장(別將)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일대 관방을 재편한 것은 영조 30년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영조는 도성의 외곽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임진강 일대의 방어체계를 개편했다. 이에 임진나루는 임진진(臨津鎭)으로 바꾸고, 강의 하류에 있는 장산진(長山鎭)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경기지역의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 총융청(摠戎廳)에 소속시켰다.
8개 장산진 돈대의 규모
장산진에서 관할하는 돈대는 총 8개소에 이른다. 돈대의 뒤로는 장산진성(長山鎭城)이축성되어 있어서 상호 간의 연계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임진진성(臨津鎭城)과도 약 1km의 거리에 있다. 이들 돈대는 적의 침투 시에는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갖출 수있었다. 아울러 도강처(渡江處)가 될 수 있는 나루터(장산나루, 동파나루 등)의 배후에 있어 강으로 접근하기 쉽고 배를 정박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훼손된 역사 국방유적지 과거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장산진 돈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및조사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이 장산진 돈대에 가한 역사문화유적 파괴는 용서할 수 없는 상처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1942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장산진 돈대의 규모와 구조에 대한 기록이 있어 대강이나마 살펴볼 수 있어 다행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이 돈대는 모두 흙으로 쌓은 토축(土築) 성곽이고 숫자는 8개소였다. 크기는 1돈대에서 8돈대의 둘레가 39~176m로 다양하였다. 그리고 제4돈대는 일부 돌로 쌓은 석축이 있었다. 형태는 원형 또는 타원형이었다. 돈대의 높이는 3.6m이고돈대로 들어가는 성문도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장산진 돈대의 특징
구조적 측면을 볼 때 경기도 일대 돈대는 성벽의 높이가 낮아지고 폭이 넓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화포와 같은 공성무기에 의한 성벽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들 돈대는 성내 부속 방어시설이 간소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돈대의 축성이 산정과 같은 제한적 공간에서 이루어졌고, 개별 돈대 축성 목적에 맞는 시설물들이 선택적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특징이 경기 일대 돈대가 17~18세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은 기존의 방어 거점 중심의 수비체제가 본성과 돈대의 연결을 통한 연계 방어체제로 변화해 가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이해된다. 아울러 돈대는 대규모 축성에 따른 인력과 비용 조달 문제를 해결하고 최대의 방어 효과를 가질 수있는 성제라는 점도 수용 배경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산진 돈대는 주변의 관방시설과 연계가 되는 지점에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장신진이 임진진과 함께 설치된 이유는 임진나루의 상류부터는 하안단구와 협곡이 발달해 자연 방어선이 형성되는데 반해 하류방향으로는 옛장릉으로 통하는 길에 막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장산진이 관할한 돈대 8개소는 열을 지어 거의 등간격으로 설치되었으며, 돈대 배후로는 장산진성을 축성해 상호 간의 연계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임진진성과도 약1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적이 침투 시유기적인 대응 체계를 잦출 수있는 조건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장산진 돈대는 양서 지역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인 의주대로와 인접하고 있으며 강원 내륙까지 이어지는 임진강 수로와 면하는 곳에 위치하는 입지를 보인다. 의주대로는 한양-고양-파주-장단-개성-평양-의주에 이르는 간선로로 사행로이자 북방 이민족의 침투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임진강은 바다와 이어져 있어 서해안지역과 내륙의 물자 가 이동하는 수로로 활용되었다.
노영대
문화재
전 문화재전문위원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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