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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 ㊺ 허풍장이 마르코

입력 : 2016-07-21 16:03:00
수정 : 0000-00-00 00:00:00

허풍장이 마르코

 

칭기즈칸 집안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면서 세계의 일체화를 완성했다. 여행과 교역을 통해 관념과 지식이 한바탕 혁명을 시작했다. 많은 유럽의 선교사, 여행가, 모험가, 상인이 각자의 목표를 갖고 중국을 찾았고 그들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 가운데서 서양인의 집단 기억 속에 중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마르코 폴로 여행기》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베네치아의 상인인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17살 때인 1271년에 고향을 출발하여 중국에 왔다가 24년 후인 1291년에 귀향했다. 그는 중국에 온 후 쿠빌라이가 통치하던 원나라 조정에서 17년 동안 일하면서 중국 각지를 견문하였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 4년 뒤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동방무역로의 지배권을 둘러 싼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마르코 폴로는 포로가 되어 제노바의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감방동료에게 자신의 여행경험을 들려주었고 동료가 이를 기록한 것이 《마르코 폴로 여행기》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 항주를 천당과 같이 아름답고 물자가 풍부하며 인구는 160만 호나 된다고 묘사했다. 유럽인들로서는 그런 규모의 도시가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주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성하고 가장 규모가 크며 잘 관리된 도시였음은 분명하지만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던 것 같다(160만 호란 숫자는 아무래도 심한 과장이다). 같은 시기에 북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는 인구가 10만 명 정도이고 왕궁과 교회를 제외하면 건물다운 건물이 없었다.

 

파리의 거리는 좁고 유흥업소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도시의 위생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마르코 폴로를 허풍쟁이이라고 손가락질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묘사는 과장이 심하고 그의 시각은 철저하게 상인적이어서 인문학적인 관찰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중국에서 17년이나 살았으면서도 가장 중국적인 특색이라고 할 만리장성과 차와 전족(纏足)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의 전문 연구자 가운데서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원 왕조 시대에 만리장성은 심하게 파손되어서 변방을 지키는 방책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르코 폴로는 몽고인과 색목인(色目人) 사이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중국인의 차 마시는 습관과 전족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글 박종일(지혜의 숲 권독사)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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