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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강물에 새긴 이야기 ⑤성혼의 얼굴(下)

입력 : 2015-09-10 12:01:00
수정 : 0000-00-00 00:00:00

정처 잃은 산림처사 우계 성혼

 

▲파주읍 성현로 55에 있는 우계 성혼 기념관 내부 모습.

 

우계 성혼은 우계학의 창시자이고 조선 성리학의 한 봉우리로 평가되지만 면모가 잘 그려지지 않는 인물이다. 퇴계를 사표로 따른 학자, 율곡과 성리학 논쟁을 펼친 율곡 평생의 벗, 정도가 성혼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접근방식이다. ‘너도밤나무’ 명명법처럼 다른 것과 비교를 거쳐야 이해되는 방식이라 할까? 그래서 성혼의 면모를 설명하는 가장 선호하는 인용문이 이런 것이다. “만약 견해의 경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겠으나 행실의 독실함은 내가 우계에게 미치지 못한다.” 율곡이 성혼을 두고 했다는 말이다. 천재 율곡과 비교되는, 어떤 면에서는 그를 넘어서는 인물이란 뜻이겠다.

 

성혼은 끊임없이 닦고 고민하고 자신과 고투할 뿐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서지 않는다. 벼슬은 오로지 사양할 뿐이었고, 율곡이 성혼 등과 모여 살며 공부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도 그럴 시간에 자신을 더 가꿔야 한다며 시큰둥해 한다. 하지만 이런 은거처사도 전란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우계 성혼의 시 '술회'

 

임진란이 터진 해 5월 초하루. 성혼은 이천과 안협 사이로 피란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지쳐서 쓰러진다. 또 왜적이 사방에서 핍박하므로 밤새도록 여러 번 도망해야 했다. 5월 초하루는 선조가 한 밤에 임진나루를 건너 간 다음날이다. 성혼은 삭녕, 적성, 개성에서 군병을 불러 모으는 일을 한다. 그리고 성천으로 가서 광해군을 알현하고 의주 피란조정으로 갔다가 남하해 해주에 머문다. 벼슬을 사직한 뒤에는 연안, 각산 등을 떠돌다 3년만에야 파산의 집으로 돌아온다. 당시 심정을 보여주는 편지 한통이 있다.

 

“저는 평소에도 뼈만 앙상하여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는데 기력이 다 떨어져 뼈만 남은 한 목숨이 어찌 이와 같이 모질단 말입니까. 만일 춥기 전에 죽지 않는다면 그 고통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꼿꼿한 자세보다는 솔직한 심정이 드러나는 글이다. 성혼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전쟁으로 집이 불타버린 것도 이유였을 것인데 돌아온 뒤 1598년 정월에도 집이 불타는 화를 당한다.

 

“서책이 모두 화염 속에 파묻히고 집과 먹을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용천에 들어가 노비들 사이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자 하나 내가 질병을 앓기 때문에 떠나가지 못하여 거듭 곤궁함을 당하니 이는 하늘이 명하신 것입니다.”

이 글에서도 꿋꿋한 모습보다는 주어진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엿보인다. 성혼은 이 해 6월에 사망한다. 장례는 미리 남긴 유서를 따랐다. 성혼은 장례에 향약을 동원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 것, 묘비에는 ‘창녕성혼묘’ 다섯 글자만 남길 것 등을 유서로 남겼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성혼의 태도는 당파에도 영향을 주었다. 집권 서인의 소론으로 분화한 후예들은 정치사안에 대해 원칙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당파와 협력하고 교류하는 경향을 보인다.

 

성혼이 보여준 개인적인 성품에도 불구하고 향약에 따른 마을 백성의 고충은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일제시대 파산에서 성씨 집안 노비로 태어난 김정환이란 사람은 향약의 굴레를 깬다며 동민을 선동하고 파산서원에 불을 지르고 도망한다. 일종의 계급타파운동을 벌였던 이 사람은 뒤에 개성에서 당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한다. 3백여 년 뒤의 일이지만 불경스러워 보이는 이 사건은 대학자와는 어떻게 연결될까?

 

성혼에게서 제도에 맞서거나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는 선구적인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험로를 묵묵히 지나가는 모습이 비춰 보인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역사를 살아간 모습과 닮아있다. 이것이 성혼의 얼굴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성혼을 드러내 보이자니 율곡이나 퇴계와 비교하며 ‘너도밤나무’ 식으로 말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혼이 ‘나도밤나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도밤나무’라고 말할 뿐이다. 성혼을 불러오는 일은 그에게서 천재성을 찾기보다는 이름 없이 살다간 민중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찾는 노력에 닿아있다. 그가 민중적 지식인이어서가 아니다. 전란에 표류하던 조선 백성과 같은 모습으로 살다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향약을 동민들의 고충에서 생각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성혼의 얼굴을 찾는 것은 파산서원을 불태워 민중의 존재를 드러냈던 김정환을 찾는 것과 연결돼야 한다. 둘 사이를 모순 없이 연결할 수 있을 때 역사는 살아있는 오늘의 것이 된다. 비로소 성혼의 얼굴도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다시 누군가로 이어지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기억할 필요 없는, 박제가 된 역사일 뿐이다.

 

 

이재석(DMZ생태평화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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