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 - 김홍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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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 도서> 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
김홍희 저
김혜순 발문
153×225mm / 양장 / 464면 / 38,000원 / 올컬러 도판 236점
2010년대 중후반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와 이에 맞서는 역풍인 백래시(backlash) 사이를 통과하며, 2024년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을까. 여전히 사람들에게 충분히 자각되지 않았다는 입장과 이제는 한물간 주제, 또는 갈등만 부추기는 사안이라는 의견이 공존하는 듯하다. 이러한 시점에 출간되는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는, 지난 몇 년간 문화계에서 붐을 이루던 ‘여성’,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전시와 출판 흐름의 뒤늦은 편승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이벤트 속에서 정작 페미니즘 미술의 담론과 현장을 진지하게 들어다볼 기회는 드물었다. 이 책은 지난 삼십여 년간 큐레이터이자 평론가로 미술 현장에 몸담아 온 김홍희의 도전적 저술로, 1980년대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의 여성 미술가들이 축적한 성과를 보여주는 여성적 시간의 지형도이다. 페미니즘이 당면한 15가지 화두를 설정하고 그 안에 다른 세대의 작가, 또는 생각을 공유하는 작가 2-4명을 배치해, 개인을 넘어서는 세대와 작가 사이의 팀워크를 보여준다. 이 지상 전시회에 초대된 44명의 여성 미술가들은 부계적 가치관과 남성중심의 화단 권력에 맞서며, 억압되어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나 부재하는 것을 여성의 상상력과 은유적 언어로써 회복하는 페미니즘의 책무를 수행한다. 나아가 신분, 인종, 성별, 장애 등 차별 유형들의 교차성에 주목하는 미래의 청사진까지 제시함으로써 현대 페미니즘 미술의 최전선을 확장해 간다. 여기에 작가들의 말, 엄선된 주요 작품들 236점이 컬러로 함께 수록되어 담론과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다각적으로 전달한다.
여성적 목소리로 그려낸 한국 현대 미술의 지형도
이 책은 15장으로 구성된 본론을 중심에 두고 이를 돕는 글 두 편이 앞뒤에 배치된다. 「글을 읽기에 앞서: 한국 현대 페미니즘 미술의 흐름」은, 페미니즘 미술 운동의 발아기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 민중계 페미니즘, 1990년대 탈모더니즘 경향의 페미니즘 미술에 이어, 다문화주의와 글로벌리즘을 표방한 본격적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시대인 2000년대까지의 변화의 흐름을 살핀 뒤, 2010년대 이후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리부트’된 소위 ‘넷페미’ 현상을 짚어 본다. 「글을 마치며: 페미니즘 미술의 빗장을 푼 나혜석과 천경자」에서는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적 연속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여성 운동과 여성 화단의 근대기 ‘허스토리’를 소환, 재조명하고,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연 나혜석과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현황을 파악하고 성과를 가늠하며 앞으로의 전망을 헤아려 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인 만큼, 저자는 담론 들여다보기, 현장 내다보기를 두 축으로 페미니즘 화두와 작가 연구를 교차, 병치하는 방식을 취한다. 각 주제 아래 원로, 중진, 청년 작가들이 팀을 이루어 특출한 사고력과 색다른 감성, 창작의 희열과 고뇌를 보여준다. 저자의 이같은 매핑(mapping)과 분류 방식은, 남성중심의 미학적 지형 분류 방식이 아니라 “미술 작가들의 목소리와 그 결, 방법적 구현들로 분류한 것”(김혜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두와 작가의 조합마다 달라지는 분절적 배열이 각 장에 독립적인 의의를 부여하기 때문에,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읽어도 무방하다.
여기 포함된 작가들은 ‘페밍아웃’한 페미니스트도 있고, 작업의 내용은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으나 페미니스트로 불리길 거부하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큐레토리얼, 비평적 판단을 중시하여, 본질론이나 해체론의 시각에서 다양한 주제를 쟁점화하는 작가들을 일차적 대상으로 선택했다. 여성 문제보다는 사회의식이나 역사 인식을 우선시하거나 페미니즘 계보의 바깥에서 작업하는 젠더중립적인 작가도 있는데, 이들은 페미니즘의 여러 목소리, 그 다양성과 확장성의 맥락에서 포함되었다.
페미니즘의 영원한 화두 — 섹슈얼리티, 몸, 광기·에로스·히스테리
저자 김홍희가 설정한 키워드들을 차례로 일별해 보면, 페미니즘에서 가장 기본으로 다루어지는 여성성과 몸으로 시작해, 성 정체성, 정치, 환경, 계급, 인종 등 억압과 소외를 야기하는 주제들로 발전해 간다. 이어서 미학, 알레고리, 매체의 측면에서 페미니즘 미술의 지평 넓히기를 시도하고, 끝으로 페미니즘의 컬렉티브 활동을 살펴본다.
첫번째 장 「여성성과 섹슈얼리티」의 작가는 윤석남(1939)과 장파(1981)로, 이들 작품은 여성성에 바탕을 둔 본질주의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지만, 주제의식이나 조형적 방법론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여성 특유의 관계지향적 감수성, 모성적 사랑과 여성의 힘을, 후자는 육체적 섹슈얼리티와 심리적 에로티시즘을 주목함으로써, 각각 1980년대 후기본질주의의 양대 축인 미국의 여성중심론과 프랑스 네오페미니즘을 상기시킨다. 성차를 거부하는 해체주의 페미니즘에 비해 뒤쳐진 시각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본질주의는, 그러나 대중에게 호소하는 힘과 실존적 생명력을 지니는 까닭에 계속 재등장하고 있다. 윤석남과 장파 역시 본질주의 한계 속에서 본질주의를 전략화하는 동종요법적 발상으로 페미니즘 정치학을 수행한다.
「몸의 미술」에는 괴물적 상상력과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신체미술과 후기신체미술의 양상을 보이는 세 작가, 이불(1964), 이피(1981), 이미래(1988)가 초대된다. 이불의 ‘몬스터’ 연작, 이피의 ‘검고 따뜻한 짐승 한 마리’, 이미래의 〈캐리어즈〉로 대변되는 괴물은 계급, 인종, 젠더, 연령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경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로 현현한다. 이들의 작업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로테스크에 긍정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이 괴물 같은 생명력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광기, 에로스, 히스테리」에는 ‘미친년’의 정신분석학적 함의를 카메라 렌즈로 파헤치는 사진가 박영숙(1941), 에로티시즘을 ‘원초적 생명력’으로 파악해 해학적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다매체 예술가 이순종(1953), 대담한 페인팅으로 악동 소녀의 도발적 히스테리를 표출하는 이 시대의 앙팡 테리블 이은새(1987)가 등장한다. 이들은 해방의 탈출구를 찾는 심리적 반항아들로서, 여성을 타자로 간주하는 부계적 젠더 이념에 맞서 무의식적 통로로 분노를 폭발시킨다.
해체주의 페미니즘과 차별의 유형들 — 퀴어, 정치, 환경, 계급
‘퀴어’는 ‘이상하고 색다른’ 섹슈얼리티로 정상과 비정상의 규범을 탈피하고, 해체주의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인종, 장애, 난민 등 소수자를 옹호하는 정치적 기제로 작동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 세 명으로 구성된 「퀴어 정치학」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로 남성에 편향된 역사관에 도전하는 정은영(1974), 길거리나 무대 퍼포먼스로 역사의 피해자와 난민, 퀴어 등의 권익을 주장하는 흑표범(1980), 부계적 가족 제도와 생식 메커니즘의 기저를 흔드는 ‘넷페미’ 세대의 웹 미디어 아티스트 김나희(1991)를 소개한다. 이들의 작품은 성 정체성의 본질을 의심하며 젠더 규범을 추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저항적 여성서사」는 문명, 시대, 체제 비판의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측면에서 궤를 같이하는 네 작가, 임민욱(1968), 송상희(1970), 함양아(1968), 김아영(1979)을 매치시킨다. 이들은 근대화의 폐해, 전지구적 재앙,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비판적으로 대응한다. 연구 기반의 학구적 태도와 혼합 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직역 대신 의역, 직유 대신 은유를 선호하는 우화적 방식에서, 무엇보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읽어내는 서사적 충동에서 서로 닮아 있다.
「에코페미니즘」으로 묶인 홍이현숙(1958), 조은지(1973), 홍영인(1972)은 자연과 여성을 타자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지배원리를 비판하는 생태주의 페미니스트들이다. 특히 이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생태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생태 문제는 페미니즘 관점에 기초해야 한다는 급진적 생태주의 페미니즘, 특히 동물권을 옹호하는 동물주의(animalism)와 노선을 같이한다.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근원이 환경뿐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진화 과정에 있다는 인식 아래,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과 더불어 사는 공존동생적 비전으로 페미니즘을 확장시킨다.
여성이 재현하는 여성의 초상은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대상이 젠더적으로 일치함으로써, ‘남성은 보는 주체, 여성은 보이는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시각 법칙을 무화한다. 「감정노동자의 초상」에 등장하는 작가 주황(1964), 신민(1985), 치명타(1988)는 각각 사진, 조각, 영상을 주매체로 작업하지만, 초상화라는 전통 장르를 현대화하고 오로지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한데 만난다. 이들의 초상은 작가라는 감정노동자에 의해 재현된 감정노동자들의 초상, 즉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새로운 유형의 페미니즘 초상으로서 미술사적, 비평적 의의를 갖는다.
경계인의 정체성 — 노마디즘과 디아스포라
「노마디즘」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행하는 김수자(1957)와 함경아(1966)는 여행을 통해 현대 노마디즘의 윤리를 실천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김수자는 인류학적 관심으로 유목민적 여행을 수행하며, 함경아는 여행을 통해 예술적 발상을 일으키고 숙성시킨다. 이 두 작가의 노마디즘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인 글로컬리즘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노마디즘의 물리적, 상징적 표상이며, 함경아의 북한 자수는 변방의 기예가 문화적, 지리적으로 재조명되는 이동의 메타포로 의미가 확장된다. 치유자, 매개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함축하는 김수자, 분단을 주제로 하는 대화와 부드러운 예술적 접근으로 북한과 소통하려는 함경아의 작품에는 강력하면서도 설득력있는 환대의 메시지가 존재하며, 그로써 확장된 페미니즘 미술의 사례가 된다.
「디아스포라 미술」에서는 북미 대륙의 디아스포라 작가 차학경(1951–1982), 민영순(1953–2024), 윤진미(1960)의 작업을 후기식민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다룬다. 후기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은 독자적인 담론이지만, 각각 민족 정체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자각으로 타자, 주변, 차이의 경험을 논의하고, 언어, 담론, 이념의 해체적 기획을 통해 사회 변혁과 가치 전복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상호연대가 가능하다. 자신이 속한, 동시에 결코 속할 수 없는 장소에서 인종적, 국가적, 젠더적 타자의 입장에 처하는 한편, 모국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인해 이중 소외를 겪는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장소, 문화, 언어의 측면에서 상이한 한국과 북아메리카의 이중 경험에 기초하여, 세계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양가성을 지닌 특수한 예술 언어를 창안했다.
여성적 언어와 매체 — 추상 충동, 알레고리, 매체 번역
추상미술은 이십세기 모더니즘의 총아로서 남성 양식으로 주류화되었으며, 추상 대 형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 속에서 여성 미술을 타자화하는 미학적 기준이 되었다. 여성 미술은 형식보다 내용과 주제, 체계보다 상징과 서사를 중시한다고 단정되면서 폄하되어 왔던 것이다. 「추상미술에서의 여성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자의 성별이 아니라 작품 속 젠더의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추상화에서의 여성적 영역을 논한다. 양주혜(1955)는 색점과 바코드, 홍승혜(1959)는 컴퓨터 픽셀, 박미나(1973)는 딩벳 폰트로 각기 고유한 추상적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이들은 추상 충동으로 남성중심적 추상 신화에 도전하는 동시에 여성 추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김명희(1949), 김원숙(1953), 조영주(1978)는 모두 한국 여성 특유의 사적 경험을 집단 신화와 공동체 상징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알레고리 형상」에 초대되었다. 김명희와 김원숙은 객관적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알레고리 화풍의 작가라는 점에서 상통하며, 다매체 작가인 조영주는 매체적 융합, 판타지 픽션으로 결이 다른 작업을 선보인다. 동물로 의인화되거나 특히 여성의 모습으로 도상화해 온 알레고리 재현의 관례를 고려할 때, 자신과 여성을 형상화하는 이들 작업에서 알레고리 수사학과 페미니즘 정치학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번역의 매체와 양식」에는 재료 발굴, 매체의 확장, 기법 및 양식 실험을 통해 여성 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일궈내고 있는 이수경(1963), 신미경(1967), 이세경(1973)을 소개한다. 이수경과 신미경은 각각 깨진 도자기 파편과 비누라는 뜻밖의 재료로 고도의 장인 정신을 발휘하며, 이세경은 머리카락에 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발상으로 번역 이데올로기에 합류한다. 이들은 특정 매체나 예술품이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번역의 과정에 주목하고, 그에 따르는 복제, 인용, 차용의 전략으로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또한 문화적 번역이 성별 정체성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이를 통해 절대적 가치와 미술사적 관례를 뒤흔든다.
페미니즘 미술의 확장성과 컬렉티브 활동
「불편함의 미학」이라는 주제 아래 모인 정서영(1964), 김소라(1965), 양혜규(1971)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대안공간의 출현과 함께 부상한 후기신세대 작가들로서, 비교적 젠더중립적인 태도를 지닌다. 그럼에도 이들을 포함시킨 까닭은, 다양한 음성들이 복합적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페미니즘 미술의 확장성 때문이다. 여기서의 ‘불편함’은 작품이 난해해서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는 뜻이지만, 의외로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나 형태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김혜순 시인은 발문에서 솥, 집게, 빨래 건조대 같은 가사노동의 도구들이 형상화된 양혜규의 〈소리 나는 가물(家物)〉을 가리켜 이렇게 해석했다. “나의 용어로 풀이하면 ‘여자짐승사물한다’고 볼 수 있다. (…) 이런 ‘여자짐승사물’ 사이에 경계 없이 존재하는 유기적/무기적 몸만이 (…) 여자로서의 ‘미술하기’를 할 수 있다. 이것을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처럼 불편함의 미학이 제공하는 해석의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
공예는 여성의 가사 노동과 연관된 기원적 특성상 페미니즘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수공예와 민예」에서 소개되는 이영순(1950)과 장응복(1961)은 전통 공예의 발전적 계승을 모색하는 동시에 여성 공예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다. 사라져 가는 지승(紙繩) 공예를 계승, 현대화하는 이영순, 전통 민예를 모티프로 새로운 텍스타일을 선도하고 있는 무늬 디자이너 장응복은, 가사 행위가 여성 공예의 창조적 동인이었음을 인식하고 실용성, 예술성, 제품성을 아우르며 전통적인 여성 가사 문화의 맥을 동시대에 이어 가고 있다.
여성 작가들의 치열한 연대 활동이 오늘날 여성주의 미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추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마지막 장은 「페미니스트 컬렉티브」로 배정되었다. 한국 페미니스트 컬렉티브의 미술사적, 비평적 의미를 살펴본 후, 페미니즘 컬렉티브의 위치를 끌어올린 중진 그룹 ‘입김’과 신진 그룹 ‘노뉴워크’의 활동, 그리고 각 그룹의 일원이자 투철한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인 정정엽(1962)과 봄로야(1980)의 작품과 전시 활동을 차례로 다룬다.
여성 ‘미술하기’, 여성 ‘미술 읽기’
책 끝에는 1980년대 우리나라 페미니즘 미술이 태동하던 시기에 미술가들과 함께했던 김혜순 시인의 발문 「김홍희라는 접속사—여성 ‘시하기’와 여성 ‘미술하기’」가 실려 있다. 그는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소수성은 다른 소수성과의 접속 없이는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 소수성이라는 접속체가 바로 문학적 담론, 시 문학과의 연결고리라고 보았다. 시는 언어로 씌어지지만, 시 역시 언어가 아닌 ‘이미지로 사유하는’ 예술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자 김홍희가 이 책에서 예리한 안목으로 문학 용어를 사용해 우리 여성 미술의 문학성(쓰기)을 중요한 페미니즘 미술의 특징으로 부각시켰음에 주목하고, 여성 시인들이 ‘시하는(doing poetry)’ 것처럼 페미니즘 미술 작가들도 ‘미술한다(I do art)’고 말할 수 있다 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시와 마찬가지로 ‘말하기’가 전제되는 미술이다. ‘말하는’, 동시에 몸으로 ‘하는’ 미술이다.”
책의 첫 페이지들이 미술가 44인의 말로 채워진 것도 어쩌면 이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작업 노트, 인터뷰, 에세이 등에서 발췌한 문장들은 한데 어우러지고 중첩되며 또 다른 접속의 풍경을 그려낸다. “나는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다. 그림을 쓰고 있다”는 양주혜의 진술은 자신의 작품에만 한정된 것이라기보다 미술가들이 ‘미술하기’라는 ‘글쓰기’를 통해 ‘여성하기’를 수행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책의 제목이 ‘페미니즘 미술 읽기’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저자는 글을 쓰는 동안 작가들과 친밀하게 소통하면서 비평이나 큐레이팅이 ‘사랑의 행위’라는 평소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한다. 비록 개념적인 지상 전시회이지만 저자의 큐레이터로서의 내공과 역량, 동시대 작가들의 에너지가 응집된 『페미니즘 미술 읽기』는 한국 현대 여성 미술사의 아름다운 결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2021. 1.–2022. 4.)가 발단이 되었다. 이후 신문 지면에 맞게 짧게 작성되었던 원고를 이론적으로 대폭 보완, 재구성하고 주석 작업과 주요 작품 선별 과정을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한편,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미술 해외출판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영국의 파이돈(Phaidon) 출판사에서 발행하게 된 영문판이 10월에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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