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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특집]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입력 : 2017-07-17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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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파주시민참여연대 지역탐방 프로그램 '한국전쟁 파주역사올레' 진행



 지난 7월 1일(토), 파주시민참여연대는 ‘한국전쟁 파주역사올레’를 진행했다. 파주역사올레는 파주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를 가슴으로 만나는 탐방 프로그램이다. 이번에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해서, 교전이 매우 치열했던 칠중성부터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 북한군 묘지, 두포리 민간인 학살 터를 방문했다. 

이 답사는 한국전쟁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며 돌아볼 수 있어 의미 깊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의 국제전 성격, 품위 있는 추모의 방식, 전쟁의 고통과 슬픔, 우리에게 과제로 남은 평화의 문제 등을 한번쯤 생각해 보도록 하는 답사였다.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이 훤히 내다보인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가 된 까닭이다.


영국군과 중국군의 격전지였던 ‘칠중성’

답사에서 가장 먼저 간 ‘칠중성’은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중성산을 둘러싼 산성이다. 중성산은 147미터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그렇지만 이곳에 올라가 보면 주변이 훤히 내다보인다.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인 이유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곳은 한국전쟁 때에도 격전지가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격전을 벌인 군대는 영국군과 중국군이었다. 1951년 거침없이 남하하는 중국군과 이를 막으려는 영국군이 충돌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내전이면서 동시에 국제전’이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3만이 넘는 중국군에 맞선 영국 글로스터 대대는 약 66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글로스터 대대는 3일이나 버텼다. 글로스터 대대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전열을 정비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남하를 막을 수 있었다.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에 있는 동상. 영국 군인들이 무표정한 얼굴과 지친 눈빛을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  

칠중성에서 시작한 전투는 설마리 계곡까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 59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설마리 계곡에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이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품위 있는 추모 공원이다. 게다가 이날 멀리서 추모 공원을 찾아온 영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답사 팀은 우연히 마주친 영국인과 함께했는데, 설마리 전투에서 희생된 영국군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우리는 과연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애도의 공간으로서 잘 갖추어진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비. 답사에 참여한 학생이 전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한 소년병의 편지를 읽고 적군묘 참배

답사 팀은 다음 목적지로 가는 차량 안에서 한 소년병의 편지를 낭독했다. 편지는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라고 죄를 고백하듯이 시작했다.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라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두려움을 드러내기도 하다가, 결국은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는 다짐으로 맺었다. 그렇지만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는 슬픈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깊게 긁어 파서 큰 상처를 내는지 느낄 수 있는 가슴 먹먹한 편지였다.

전쟁이 낳은 두려움과 슬픔을 잘 느낄 수 있었던 편지의 여운을 간직한 채, 적성면에 있는 북한군 묘지에 들렀다. 이곳에는 전쟁 때 죽은 인민군과 전후 공산 게릴라가 묻혀 있다. 이름과 계급이 적힌 비문도 있지만, 대부분 ‘무명인’의 묘지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신은 가슴에 황량함과 쓸쓸함을 남겼다.




파평면 두포리 민간인 학살터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평면 두포리에 있는 민간인 학살 터였다. 한국전쟁에서는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이 있었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고,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모두 중대한 전쟁 범죄다. 이곳에서는 인민군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설치되었던 국가 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의 진상을 조사했다. 그에 따라 수없이 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이 밝혀졌다. 그러나 유해 발굴 작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거나, 추모비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학살 가해자를 처벌하지도 못했다. 과거 정리는 여전히 미흡한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이는 학살의 영향이 크다.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짓밟아 버리는 집단 폭력이 벌어지는 현재는, ‘확고한 우리 편이 아니면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벌인 민간인 집단 학살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반복된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현재에 반복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전쟁의 규범이 내면화되어 있다. 과도한 두려움을 지닌 채 삶을 전쟁처럼 구성한다. 중고등학생은 입시 전쟁을, 청년은 취업 전쟁을, 직장인은 살아남기 전쟁을 벌인다. 일상을 마치 전쟁처럼 여기니,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나부터 살자’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각종 모임이나 사업을 굳이 군사 돌격대처럼 운영하기도 한다. 심지어 민주주의를 단지 표 대결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천박한 선거 문화를 낳고, 민주주의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 전쟁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쟁처럼 일상을 계속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다음 파주역사올레는 무더운 8월에는 쉬고 9월에 다시 시작한다고 한다. 지난 ‘3‧1운동 파주역사올레’의 성공적인 진행이 알려진 덕분에, 이번 역사 답사는 일찌감치 신청이 마감이 되었다. 늦게 신청한 이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일마저 벌어진 것이다. 다음 답사는 8월에 신청을 받을 예정이라고 하니, 인기가 높아지는 파주역사올레에 서둘러 신청하는 것이 좋겠다. 


글‧사진 서상일(자유기고가)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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