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고딩의 같잖은 문화 리뷰 <36> 난민인권단체방문기4 록빠 <사직동, 그 가게>
수정 : 2019-05-13 08:00:13
흔한 고딩의 같잖은 문화 리뷰 <36>
난민인권단체방문기4 록빠 <사직동, 그 가게>
좋은 아침이야, 사직동에 가자
종로에 올 때마다 외국인이 된 것 같았다. 관광객 대상으로 한 한옥이며 한식들이 한국인인 나에게 낯설었다. 1만2천 원짜리 곰탕을 파는 식당을 지나고 세차장 같은 모텔 지나서 한옥도 아니고 한식도 팔지 않는 곳, 그럼에도 낯설지 않은 가게에 도착했다. 나무 간판에 물감으로 단정하게 쓰인 ‘사직동, 그 가게’가 보였다. 오래된 목재들에 정겨움을 느꼈다.
고개 숙여 낮은 문 통해 들어가면 묘한 향냄새가 먼저, 노란 불빛 아래 이색적인 공예품들이 두 번째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잠양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꽁지머리 묶고 웃어 보이는 잠양씨는 티베트 난민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트 난민 2세이자 티베트 난민을 위한 NGO 단체인 록빠를 운영하는 대표이기도 했다. 한국에 와 ‘사직동, 그 가게’에 티베트의 숨결을 불어넣고, ‘사직동, 짜이집’의 주방장을 맡아 이국적인 요리를 선보였다.
1959년 티베트를 탈출한 잠양씨의 부모님은 인도에서 잠양씨를 낳았다.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의 정치적 관계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얻지는 못하지만, 인도 정부에게 티베트 사람들만의 마을을 제공받았다. 잠양씨도 인도에서 학교를 다녔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다. 잠양씨의 선택도 가족의 선택도 아닌, 후원자가 후원을 포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록빠가 일방적인 지원 대신 티베트 난민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잠양씨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록빠는 티베트어로 친구, 돕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난을 도와주는 게 아닌, 가난한 사람의 꿈을 도와주는 일을 록빠는 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잠양씨는 완벽한 티베트어를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티베트어, 인도어, 영어, 한국어까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지만, 모국어가 주는 안정감을 잠양씨와 같은 티베트 난민들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60년 동안 티베트어는 점점 옛말이 되어갔다. 티베트어를 접할 수 없으니 잠양씨보다 어린 티베트 아이들은 아예 티베트어를 하지 못했다.
현재 티베트어는 아주 옛날에 쓰던 상태에 멈춰있다. 한글로 따진다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라…. 때문에 티베트어를 제대로 배웠다고 말하려면 16년을 내리 티베트어만 공부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이 쓴 책은 어렵기만 하고, 어린이를 위한 책은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록빠는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 쉽게 집어갈 수 있는 티베트어 책들을 만들고 있다. 1000부를 출판해서 800부를 무료로 배포하고, 도서관에 록빠 책장을 만들기도 했다. 티베트 서적이 있는 도서관들은 책을 깔끔하게 보관하는데 치중하느라 사람들이 책을 편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데, 록빠 책장의 책들만큼은 마음껏 뽑아가서 읽어도 괜찮았다. 매달 새 책이 책장에 꽂히고,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 학교를 나와 엉성한 조각상들이 줄지어 서 있던 공원을 지났다. 커다란 육교에서 바라보던 길에는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그 젊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고, 어렵기만 한 책을 뽑아 젠체하는 친구들을 우스워하기도 했다. 3층짜리 건물에는 어린이 도서실이 따로 있었다. 소파는 알록달록하고 책장은 귀여울 정도로 낮은 어린이 도서실을 교복을 입고도 부끄럽지 않게 들어갔다. 얌전히 앉아 그림책 붙들고 친구를 기다리던 동생이 떠올랐다. 나와 친구도 그 소파에서 마음껏 책을 뽑아 읽곤 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어릴 적 읽던 그림책들이 아직 남아있다. 나와 언니들이 어릴 때, 엄마는 이불 위에 누운 우리에게 그림책을 한 권씩 읽어줬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나는 책을 좋아하게 됐다. 티베트 아이들이 티베트어로 쓰인 그림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게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릴 적 읽은 책들이 지금 내 말과 글에, 지금에 나에게까지 스며들어 있다고 느낀다.
잠양씨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아닌 슬기로운 사람. 슬기로움이란 공부를 잘하거나 두꺼운 책을 많이 읽으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래된 그림책들을 보며 나는 슬기로움을 발견한다. 슬기로움은 지혜보다 가깝고 똑똑함보다 실용적인 느낌이었다. 그림책은 그런 얘기를 했다. 어렵지 않게 어떤 사람이 될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돕는 데에도 슬기로움은 필요하다. 잠양씨는 알고 있었다. 타의에 의해 학교를 나와야 했던 것은, 슬기롭지 못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립이라는 슬기로운 단어를 떠올렸다. 티베트 난민들에겐 자립할 힘이 필요했다. 자립할 힘은 자선사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포트, 그리고 호프. 두 개면 충분하다.
록빠의 첫 번째 사업이었던 탁아소.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 부모들은 일을 해야 했다. 유목민으로 살아온 사람들로서 일하기 쉽지 않았다. 유목민 중에선 학력도 경력도 없는 여성이 많았다. 원치 않았지만, 중국의 불법 자원 채굴을 목격하게 되는 유목민들은 정부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남편이 사라져서 아이들을 살리려 도망쳐 나온 여성들. 그런 여성들을 위해 록빠는 여성 작업장을 만들었다.
록빠에 속한 친구들은 모두 자원활동가다. 활동가들은 각자의 능력으로 티베트 난민들을 돕는데, 그 중에는 재능기부라는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부를 도와주기도 하고 가진 기술을 공유하기도 한다. 여성들은 활동가들에게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6개월 만에 근사한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배우는 과정에서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배우는 기간부터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록빠는 동정심을 팔지 않았다. 동정은 금방 휘발되는 감정이라 언젠가는 한계가 보인다. 좋은 제품, 쓸모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게 록빠의 목표였다. 그런 마음가짐은 교육을 받을 때부터 시작된다. 록빠는 이제 14년 된 단체인데, 록빠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40년 경력의 단체에 스카우트를 받고 생각지 못한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다.
부모의 슬기로움이 아이를 슬기롭게 만들었다. 그건 난민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라고 잠양씨는 강조한다. 얼마 전 한국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에 대해서도, 반짝 관심을 갖지 말고 그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야 한다 당부했다. 성실하게 돕고 생각하는 것. 그게 록빠가 말하는 진짜 서포트였다.
호프, 희망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록빠는 일자리를 그냥 주지 않았다. 돈을 주는 건 더욱 아니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려 할 때 록빠는 서포트하고, 실제로 해냈을 때 스스로로부터 희망이 샘솟았다. 가난한 자의 꿈을 돕는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록빠가 시작된 지 14년 만에 다람살라의 티베트 마을에는 변화가 생겼다.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더 적극적인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됐다. 동정심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결과였다. 록빠가 커지는 게 아닌 퍼지는 것이 꿈이라던 잠양씨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시험공부를 할 때면 역사노트 먼저 펼쳤다. 이야기처럼 이어지는 게 좋아 머리 식히듯 공부하곤 했다. 예쁜 형광펜을 바꿔가며 꾸민 역사노트는 아직도 책장에 잘 꽂혀 가끔 꺼내볼 때면 뿌듯한 마음과 함께 그 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티베트가 처한 상황이 익숙했던 건 한국 역시 나라를 잃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를 잃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 목숨 걸고 집을 떠나야 했던 역사. 티베트는 특히 티베트 불교라는 종교가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나라였다. 중국은 티베트 사원을 불태우고 종교인들을 사형시켰다. 그 박해의 크기는 절대 작지 않았다.
‘아마 아데’는 티베트 캄 지역에서 태어나, 중국이 티베트 불교를 탄압할 때 저항하던 자들을 돕던 사람이었다. 결국 중국 정부에 의해 연행되었고 사형보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한다. 그 안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으며 살아남은 그녀는 27년 만에 지옥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 때 이야기를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The voice that remember)라는 책을 통해 증언했다.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티베트 땅을 탈출해 다람살라에 와도 오래 살지 못했다.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이다. 5년 이상 사는 사람이 100명 중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아마 아데’는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다람살라로 왔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고문한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 역시 중국에 대해 ‘화가 아닌 포용’을 말했다.
조은 청소년 기자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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