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7) 14. 침잠. 창강이 발 씻은 물
수정 : 2022-12-21 06:47:21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47) 14. 침잠. 창강이 발 씻은 물
(3)남은 사람들의 임진강. 다시 우계서원과 화석정
강은 깊이 가라앉았다. 창강이 떠난 임진강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강은 어두웠고 무엇도 비춰 보이지 않았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이 강의 참모습인지도 모른다. 기실 이 강을 거쳐 간 발걸음들이란 표면을 흔들어 잠시 찰랑이게 했을 뿐 심연은 언제나 무심했을 것이다. 그러니 빛나는 것들이 빛나던 순간에도, 그것이 사라진 시절에도, 있을 것들은 있어 여전히 강물과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 조선인이 떠난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이 메웠다.
1929년 동아일보는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늘로리 성우계 후손의 노비로 태어난 김정환. 김정환은 양반의 압박과 멸시를 피해 1919년 열일곱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다. 고향을 등지던 날 밤 그는 우계서원에 불을 지른다. 만주와 러시아를 떠돌며 사회주의운동을 접한 김정환은 1926년 고향으로 돌아온다. 농민조합을 설립하고 신분해방운동을 벌이던 그는 근거지를 개성으로 옮긴다. 그곳에서 개성공산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는데 1년여 만에 조직이 발각돼 동료 다수가 검거되고 김정환은 탈주한다. 개성공산당은 몇 차례 이름을 바꾸고 재건운동을 벌이며 30년대 후반까지 활동을 이어간다. 김정환의 이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우계 성혼은 존경받는 산림의 학자다. 그의 아버지 성수침이 파평 늘로리로 들어온 이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그 마을에 살고 있다. 우계는 집 앞으로 동리사람이 지나갈 때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인사를 올리고 지나가야 하는 동민의 불편을 배려한 것이다. 장사지낼 때도 향약을 동원하지 말라고 유언한다. 향약은 양반들에겐 도움이 되지만 향리 사람들에겐 부역의 고충을 주기 때문이었다. 양반으로서 우계는 최선의 인품을 보였지만 신분의 차별을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배려만으로 풀 수 없는 시대의 과제 앞에서 3백 년 전 선비와 3백년 뒤의 노비가 마주쳤다. 우계서실에 타오른 불길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징표였다.
“천승이 절가한 위에 인위의 일점이 가해져서 비로소 그 빛이 더하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거니와 임진강반의 화석정이 또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우계서실이 불탄 얼마 뒤 우계의 벗 율곡의 정자에 한 사람이 오른다.
“화석정의 가치는 남이 저를 보아주는 데 있지 않고 제게서 남을 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강상에 떠서나 또는 임로 중에서나 밖에서 화석정을 보는 것보다 화석정에 서서 강류와 산야를 조망하는 거기에 화석정의 가치가 있다 하겠더이다.”
숫한 길손들이 화석정을 찾아 바라보이는 경치를 노래했지만 그 가치를 이처럼 분명히 설파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글쓴이는 오전에 개성을 나왔다. 로맨틱한 봉별의 천수원을 지나 고랑포에서 배를 탔다. 그리고 장단석벽을 유람한다.
“적벽이 어떻더뇨. 강천이 닿아 있고 야외 단산이 굽이굽이 녹음인데 막힐 듯 열린 물길이 삼십리를 나리더라. 흙인 채 돌도 같고 돌인 것이 흙도 같아 다투어 이른 말씀 토벽이라 석벽이라 남성초 덮이었으니 초벽이라 할러라.”
배를 타고 여행하며 한 사람은 강을 그렸고, 또 한사람은 시를 썼다. 청전 이상범과 노산 이은상이었다. 이은상의 글은 이상범의 삽화와 함께 1934년 동아일보에 ‘적벽유’란 제목으로 실린다. 이은상은 1903년 생으로 김정환과 동년배다. 김정환이 노비의 아들인 반면 그는 왕족의 후손이었다. 김정환이 단신으로 러시아를 떠돌 때 이은상은 일본에서 유학한다. 이은상이 돌아와 지식사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동아일보에 기사를 쓸 때 김정환은 지하로 잠적했고 수배자 신분으로 신문에 실린다. 화석정에 대한 이은상의 탁견을 여기에 빌려온다면 그들은 선 자리가 극과 극으로 달랐기에 바라 뵈는 경치 역시 전혀 달랐다. 이은상의 ‘적벽유’에는 임진강 장단석벽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찬사가 담겨있다.
“그것은 분명 거룩한 정적의 전당이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화의와 숭고한 예술경이었습니다.”
이 예술경이 김정환에게는 독립과 해방을 위해 버리고 떠나야 했던 질곡의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은 포승줄에 묶이고 용수를 뒤집어 쓴 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절벽 같은 상황에서 임진철교를 통해 서울로 압송돼야 했다. 임진강에 비춰진 두 사람의 상반된 행적은 한 때의 여행자와 발붙인 자의 차이였을까? 한편으로 이 상반된 모습은 극단적 단절의 미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고편이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51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