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옆나라, 북한을 알자 <4> 우리 반의 안경쟁이
수정 : 2025-04-17 04:45:43
먼나라 옆나라, 북한을 알자 <3> 지금 북한은 가짜뉴스와 전쟁 중
이은혜(가명, 북향작가)
고등학교 때 우리 반에는 ‘안경쟁이’가 한 명 있었다. 북한에서는 안경쟁이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안경 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안경 쓰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경쟁이 친구와 다투다 시빗거리가 떨어지면 상대방은 느닷없이 “이 안경쟁이 주제에!”라는 인신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러면 안경쟁이는 얼굴이 벌게져서 새로운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식이다. 이렇게 학창 시절엔 놀림거리가 되는 안경쟁이가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 안경쟁이를 대하는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성인에게 안경쟁이는 더 이상 놀림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학생이나 선생님처럼 ‘지식인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40명 조금 넘는 우리 반에 유일한 안경쟁이는 여자애였는데, 늘 짧게 커트한 머리에 ‘멋’이라고는 전혀 관심 없는 아이였다. 딸 셋 집안의 장녀였지만, 흔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책벌레였고 공부를 잘했으나, 정말 그것밖에 모르는 친구였다. 이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학생들과의 인간관계도 서툴렀다.
그 친구는 외화벌이로 돈을 잘 버는 아버지 덕분에 우리 학급에서 학생 간부를 맡았는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부모도 그 상황을 잘 아는 터라 담임 선생님과 우리 학급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선생님은 간부역할을 못하는 안경쟁이에게 불만인 나를 잘 조율하여 고교 내내 학생 간부로 함께 했다. 졸업 때 우리 학교에 중앙급 대학 여학생 티오 두 개가 배정되었을 때, 둘이 추천받았다.
그 ‘안경쟁이’는 우리 학교에서 의대로 진학한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성적순으로 의대를 가는 한국과 달리 북한의 진학 시스템은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학교에서 1등으로 공부를 잘했던 여학생은 김형직 사범대학(김형직은 김일성의 부친, 중앙급 대학인 김형직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대학교 교원의 자격을 가진다)으로 진학했다.
나와 그 안경쟁이 친구는 같은 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대학이 달라 자주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그 친구 얼굴을 본 것은 대학 2학년쯤 되었을 때다. 정말 우연히 집에 가는 길에 마주쳤는데 멀리서도 안경 쓴 그녀의 얼굴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멋없는 옷차림에 대충 둘러맨 가방, 짧은 커트의 머리 스타일로 헤벌쭉 웃는 그녀의 악의 없는 미소가 반가웠다. 학교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너무 힘들어, 나 요즘 보통을 맞고 다녀.”라며 기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보통은 5점 만점에 3점대를 의미한다. 나는 고등학교때처럼 잘 할 수 있을거야 라고 인사하고 헤여졌다.
나중에 그 친구가 해골 모형을 가방에 넣고 다녀서 가족들과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정도로 흥미를 느꼈다면, 분명 그 친구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쯤 나름 괜찮은 의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 북한 의사들이 ‘자력갱생’으로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산에 올라 약초를 채취하고, 지역병원 개건·확장 건설에 동원되어 노동하는 일이 빈번한 현실은 안쓰럽지만 말이다. 안경쟁이에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찌질이’ 취급을 받았던 그 친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동네의 자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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