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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오해138 ⟪삼국지⟫ 이야기

입력 : 2022-05-25 02:47:19
수정 : 2022-05-25 12:05:00

이해와오해138

삼국지이야기

 

 

▲ 삼국지 번역본 400여종에 달한다. 

 

중국고전 장편소설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식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이고 줄여서 삼국연의라고 부른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기에 활동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작품이다.

·청시기에 조선의 사절들이 북경을 내왕하면서 다량의 중국서적을 사들였다. 이 경로를 통해 조선에 알려진 삼국연의는 널리 기층 민중들까지 사랑하는 작품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작품내용의 일부인 적벽대전이 판소리의의 독립된 마당으로 자리 잡았다(적벽가). 한글로 번역한 작가들을 열거하자면 양백화(1931, 매일신보 연재), 한용운(1940, 조선일보 연재), 박태원(1943, 월간 신세대 연재), 김동리/황순원/허윤석(1958, 공역), 김동성(1960), 박종화(1965), 김광주(1967), 정비석(1968), 김구용(1974), 이문열(1983, 경향신문 연재), 황석영 (1986), 김홍신(1997), 조성기(2001), 장정일(2003), 김용환(월간 학원 1952~1955년 연재만화. ‘코주부삼국지’), 고우영(일간스포츠 1978~1980년 연재만화) 등 당대의 저명작가들이다.

일본에서는 1689년에 삼국연의가 일본어로 번역되었다(번역자 湖南文山). 이 책은 최초의 삼국연의외국어 번역본이면서 일본에서 최초로 전문이 번역된 외국소설이었다. 일본 전국시대에 삼국연의는 군사정책의 나침판 역할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삼국연의의 애독자였다. 1573년에 벌어진 미가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제갈량의 공성계(空城計)를 이용하여 다케다 신겐의 군대를 물리쳤다. 2차 대전 후에는 경영철학 교본으로서 일본 기업가들 사이에서 삼국연의열독 붐이 일어났다.

삼국연의는 일직부터 베트남에 수입되어 읽혔고 한국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07년에 처음으로 현대 베트남어 번역본이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당대의 유명작가들이 번역본을 연속적으로 내놓았다.

태국에서는 국왕 라마1세의 지시로 삼국연의번역 사업이 진행되었다. 1802년에 95권으로 된 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 이 책은 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중국소설이었고 출판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특히 귀족층에서는 이 책을 용병술의 교과서로 받아들였다. 왕궁 안에는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누각이 세워지고 중학교 교과서에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몇 가지 전투장면이 실릴 정도였다.

20세기 초에는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삼국연의를 말레이어로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말레이시아인들의 호응도 높았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말레이어본 삼국연의가 인도네시아에 알려지고 현지어로 번역되었다.

스틸(John G. Steele)이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삼국연의1907년에 나왔다. 그러나 이 번역본은 중국 내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에서 영어교과서로 사용된 부분적인 요약 발췌본이었다. 삼국연의를 최초로 영어로 완역한(1925) 사람은 브류윗-테일러(Charles Henry Brewitt-Taylor)였다. 그는 중국 세관에서 일하던 영국인이었다.

현대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삼국연의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최고의 통속역사서이다. 수백 년 동안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민중은 이 책으로부터 무수한 상식과 지혜를 얻었다. 민중은 이 책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능을 습득했고, 사람 사는 도리와 처세의 본질을 배웠다. 민중이 바란 것은 재미있으면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교과서였다. 사서오경은 이런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저술자 박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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