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책만세 <4> -보이차를 마실 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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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를 마실 때, 나는
▲ 오현경: 보이차를 좋아하는 7년차 교하 주민. 11살, 7살 두 아이의 엄마.
2021년 7월, 올해 여름은 파주에서 내가 보낸 여섯 번의 여름 중 가장 덥다. 뜨거워도 너무 뜨거운 요즘, 에어컨도 없는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일은 그야말로 이열치열. 그래서 전처럼 차를 매일 마시지는 못하는데, 종종 아이들이 먼저 찻자 리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엄마, 우리 차 마실까?”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차 마시자는 아이들의 제안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이내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차를 마실 때만 볼 수 있는 두 녀석의 그 귀여운 손가락과 입술을 또 보고 싶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때 아이들은 꼬물꼬물 작고 말랑한 손가락으로 뜨거운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다. 작고 얇은 입술을 쭉 내밀어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식히고, 혹시나 데일까 봐 조금씩 호록호록 마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나는 아이들의 그 귀여운 입술과 손가락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부지런히 찻자리를 준비한다.
포트를 가져다 물 1.8L를 채운 후 가열 버튼을 누른다. 오늘은 어떤 차호에 차를 우릴까 고민한 후 몇 개 안 되는 자사호 중 가장 작은 크기의 ‘익호당 소용단(小龍蛋)’을 고른다. 내가 가장 아끼는 자사호다. 익호당은 자사호를 만든 회사의 이름이고, 소용단은 작은 용의 알이란 뜻이다. 자사호의 모양이 용의 알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5cc의 작은 자사호지만 적게는 6차례, 많게는 8차례를 우려 마실 것이기 때문에 우려 마시는 차의 총량으로 보면 결코 작지 않은 크기다. 아이들과 마실 때는 주로 무난하게 마실 수 있는 홍태창 숙병을 꺼내는 편이다. 바짝 마른 차를 싸고 있는 종이를 열어 3~4g 정도의 차를 손으로 뜯어내 자사호에 담는다. 물이 팔팔 끓기를 기다리며 찻잔을 준비한다. 아이들은 각자 선호하는 찻잔이 있다. 작은 아이는 구멍이 숭숭 뚫린 모양으로 만들어진 하얀색 찻잔, 큰아이는 흙으로 빚은 투박한 흙잔, 나는 연꽃 봉오리가 꽤 마음에 들게 그려진 청색 찻잔. 오래되어 유약이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졌지만 낡아빠진 듯한 그 느낌이 좋다. 작은 아이 찻잔은 잔의 크기가 작고 얇아서 따라놓은 찻물이 금방 식기 때문에 아이가 쓰기에 좋다. 큰아이 찻잔은 크게 크게 마시는 아이의 성에 차게 꽤 많은 양이 들어가는 잔이다. 바글바글 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차를 우리기 위해 포트로 다가가면 끓는 물의 뜨거운 열기가 나에게 훅 끼쳐온다. 온몸에서 땀이 삐질 나온다. 차호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나는 부랴부랴 선풍기를 켠다. 온몸에 난 땀이 선풍기 바람을 만나 내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데 한몫을 한다.
첫 번째 우린 물은 찻잎을 씻어내는 세찻물이다. 찻잎의 불순물이나 먼지, 이물질들을 씻어낸다. 그리고 이 물의 열기로 잔을 데운 후 버린다. 이쯤 되면 이 더운 날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올라오지만, 또 나는 부지런히 찻물을 우린다. 맑고 붉은 찻물이 잘 우려지면, 아이들 잔에 차를 채워준다. 바로 이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들의 그 입술과 손가락을 볼 수 있다. 세상 이쁘다. 내 안에 드리웠던 회의감은 이 순간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감으로 돌변한다.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이들의 찻자리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으니 나는 이 찻자리에서 얻고자 한 걸 다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속으로 만족! 아이들은 또 달라고 나에게 재촉! 두 번째 탕을 준비한다.
그렇게 3~4잔을 마시고 나면 찻자리에 대한 아이들의 집중력은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덥다는 둥, 오빠가 차를 흘렸다는 둥, 자기 이마에 난 땀 좀 보라는 둥, 동생이 자꾸 때린다는 둥. 의자에 붙어있던 궁둥이가 들썩들썩…! 이제는 아이들을 에어컨이 있는 방으로 들여보낼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 찻물은 3~4번 더 우릴 수 있다. 선풍기 바람에 마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모공이 뱉어내는 땀을 닦아내며, 나는 끝까지 차를 마신다. 먼저 차를 마시자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나만 혼자 사우나를 한 듯 온몸이 개운해진다.
아이들이 먼저 차를 마시자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이들도 종종 엄마와 함께 차분하고 편안한 시간을 갖고 싶은데, 항상 분주한 엄마가 비교적 편안해 보이는 시간이 바로 차 마시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보이차를 마실 때 나는 자연스럽게 모든 게 받아들여지고 편안해진다. 차를 우려내기 위해 차를 꺼내는 첫 순간부터 끝까지의 모든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움직이는 명상처럼. 더운 요즘, ‘엄마, 차 한잔 마실까?’ 하는 아이들의 제안이 항상 분주한 나를 잠시 쉬어가게 하니,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내책만세'는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세상이란 뜻으로, 파주 교하도서관 독서동아리입니다. 일년에 책 한 권 만들기를 목표로 매일 일상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각자 책 한 권씩을 엮어서 독립출판물을 냈습니다.
이 책들에서 한 편씩 뽑아 <파주에서>에 연재합니다. (문의 시옷살롱 031-955-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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