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책만세 <2>진달래꽃 필 무렵 – 결혼 46주년의 어느 날에
수정 : 2022-01-13 03:57:39
진달래꽃 필 무렵 – 결혼 46주년의 어느 날에
▲남월선: 2022년에 결혼 50주년을 맞는 1949년 강원도생. 수필집 <삶에 물들이다>를 냈다.
봄이 오면 고향 뒷산이 진달래꽃으로 뒤덮였다.
삭막하던 산이 요술을 부리 듯 붉은색으로 물이 든다.
언니들과, 친구들과 ‘꽃이 피면 내 마음도 피어’난다는 뜻도 모르는 노래를 부르며 꽃을 꺾으러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진분홍색 꽃도 예쁘고, 연분홍색 꽃도 예뻤다. 홑꽃, 겹꽃, 여러 송이가 뭉쳐 탐스럽게 핀 꽃은 더 예뻤다.
예쁜 꽃을 꺾다가 저 쪽을 보면 더 예쁜 꽃이 있었다.
꽃을 따라가다가 혼자 너무 멀리 가있을 때면 더럭 겁이 났다. 그러다 길을 잃을까봐 어른들이 꽃 꺾으러 가면 문둥이가 잡아간다고 겁을 주었나보았다. 꺾어온 꽃을 도랑에 꽂아두고 오며가며 봄의 전령을 들여다보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해 봄, 진달래색 투피스를 맞춰 입었다. 고향에 갔더니 만산홍화였다. 아버지가 너도 진달래꽃 같구나 하셨다.
사월 초순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달콤한 밀월, 어딜 가도 진달래꽃이 피어있었다. 근심걱정 없던 어렸을 때 보았던 꽃, 행복할 때 보았던 꽃이어서인지 봄이 오면 산에 가보고 싶어진다.
원미산진달래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꽃구경을 갔다. 소문대로 진분홍 보자기를 씌워놓은 듯, 연분홍 물감을 뿌려놓은 듯, 온 산이 진달래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원미산은 원래 진달래가 많았다고 한다. 부천시에서 모종을 밀식해 진달래동산을 만들어 놓으니 꽃이 나비를 불러들이듯 진달래 명소가 되었다. 고향 뒷산처럼 자연스러운 풍경은 아니어도 꽃구경, 사람구경은 원 없이 할 수 있다.
그늘에 앉아 쉬며 꽃술걸이 시합을 했다. 가운데 꽃술을 따서 엇걸어 당겨 먼저 끊어지면 지는 놀이다. 진달래꽃 있는 곳에서 늘 했던 놀이를 노인이 되어서도 하고 있다.
오늘은 이기는 사람이 점심을 사기로 했다. 내가 이겼다.
화가가 화필도구를 늘어놓고 자화상을 그려주고 있어 구경하다가 우리도 해보기로 한다. 결혼기념일답게 다정하게 앉아 포즈를 취했다.
꽃길을 걸어와, 꽃 속에 앉아 있으려니 취한 듯 몽롱하다.
‘연못가에 꾼 즐겁던 꿈, 깨기도 전에 인생의 가을이 온다.’는 춘초몽에 빠졌다 깨어나니 그림 속 영감과 내가 젊을 때 모습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다. 기분 좋으라고 젊게 그려주는 것 같았지만 실물 같지 않아서 주름을 더, 조금 더 많이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기념비적인 자화상을 손에 들고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 1호선, 2호선을 환승하며 전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여 그림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웃는 표정이 참 좋다.
연분홍 진달래 꽃물이 든 마음이 젊은 날처럼 발그레해졌다.
'내책만세'는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세상이란 뜻으로, 파주 교하도서관 독서동아리입니다. 일년에 책 한 권 만들기를 목표로 매일 일상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각자 책 한 권씩을 엮어서 독립출판물을 냈습니다.
이 책들에서 한 편씩 뽑아 <파주에서>에 연재합니다. (문의 시옷살롱 031-955-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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