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현 박사의 통일 문화 산책 ⑰ 갑산파 숙청 사건과 북한의 성장동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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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산파 숙청 사건과 북한의 성장동력 (1)
한 때 잘나갔던 북한이 갑자기 몰락한 원인은 뭘까? 북한은 6·25 전쟁 뒤 복구에 성공함으로써 1950년대 중반부터 10여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3%에 이르렀고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한을 압도했다. 폭격으로 인해 잿더미만 남은 환경에서 변변한 외부지원도 없이 일궈낸 연평균 13%의 경제성장률 수치는 당시 세계 최고였다. 이는 연평균 3%에 불과했던 남한과 비교할 때 놀랄만한 성과였다. 그랬던 북한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수백 만의 아사자까지 발생할 정도의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북한 몰락의 원인
직접적인 원인은 에너지난 때문이다. 80년대에 들어서며 전력생산의 주원료인 석탄이 광산의 심부화 등으로 인해 감소하기 시작했다. 석탄생산량의 감소는 전력생산 감소 ->기계, 화학공업 파탄 -> 경공업 및 농업생산량 축소 ->다시 전력생산 감소의 악순환을 거치면서 북한경제를 악화시켰다. 더욱이 80년대 후반 소련의 고르바초프 집권 후에는 외부상황까지 나빠지면서 석유 수입까지 중단되어 전력공급에 차질이 빚어졌으며 급기야 모든 산업이 멈춰서버렸다.
북한 경제가 망가진 보다 근본적 원인은 경제외적인 데 있다. 바로 70년대 이후 북한 사회가 김일성 유일체제로 바뀌면서 실패와 오류를 수정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정책토론이 사라져 내부 활력이 고갈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유승민 찍어내기"사건 이후 조성된 새누리당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유승민처럼 된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싫어할만한 발언은 기피하고, 더 나아가 각종 현안에 대해서도 아예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풍토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시범케이스효과"이다. 북한에서도 56년‘종파사건"과 67년 ‘갑산파 숙청"사건을 거치면서 김일성 일인독재로 치닫게 되고 이로 인해 내부토론이 사라졌다. 북한은 건국 당시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파 외에도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등이 두루 참여한 연합정권이었지만, 종파사건과 갑산파 숙청사건을 거치면서 김일성 유일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종파사건을 거쳐 김일성 유일체제 형성
‘종파사건"이란 1950년대 중반 발생한 권력투쟁으로 김일성 중심의 당 지도부가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협동화를 밀고 나가는 데 대해 최창익, 박창옥 등이 반기를 든 사건이다. 당시 반대파들은 주로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이었다. 처음에는 북한사회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김일성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일성의 권력 독점, 개인 숭배 등을 문제삼으면서 전면적인 반김일성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56년 8월 30일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 부재를 틈타 윤공흠이 김일성을 공격하는 등 공개적인 도전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최용건 등이 효과적으로 제압함으로써 쉽게 끝나는 듯 싶었으나 이후 중국의 팽덕회와 소련의 미코얀이 입북해 이들의 복당을 요구했다. 김일성 일파들은 곤경에 처했지만 곧이어 대다수의 반대파들을 ‘종파분자"로 낙인찍어 권력의 핵심에서 축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사회에서는 ‘반종파 투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면서 연안파, 소련파 등 김일성 비판세력은 거의 완전하게 일소되고 명실상부한 김일성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되며, 이 때 ‘주체사상"이 북한의 지배 담론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정치학박사ㆍ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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