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➅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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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두 번째 보물, 박중손 묘역 장명등
●문화재 이름 - 파주 공효공 박중손 묘 장명등(보물 제1323호)
탄현 면사무소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다가 오금리 마을로 진입하여 촌로에게 박중손 묘역을 물으니 친절하게 알려준다. 박중손이 누구일까? 국조인물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삶을 살펴보자.
칠삭둥이 유복자로 태어나다
박중손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벼슬을 하며 지냈다. 그의 아버지인 박절문도 한성부의 숭신방(현재 종로구와 성북구 일대)에 살면서 교서관 정자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부인 왕씨가 꿈 이야기를 하였다.
“여보, 꿈속에서 집채만 한 큰 소를 보았어요.”
“태몽일세 그려. 장차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가 태어날 것이오.”
왕씨 부인이 태몽을 꾼 뒤 7개월 만에 박중손이 태어났다. 박중손이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가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칠삭둥이 유복자였다.
15살 소년이 생원이 되다
박중손은 어려서 밝고 영특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끼고 다니며 글 읽는 것을 즐겼다.
“인석아, 책만 보고 다니면 넘어져. 앞을 보고 다녀야지.”
좋은 친구와 스승을 쫓아다니면서 글을 짓고 경전을 공부했기에 15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에서 치른 초시에 합격하였다. 15살 소년이 생원이 된 것이다. 생원이 된 뒤에도 학문에 힘쓰고 문장을 수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25세가 되던 해에는 급기야 대과(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에 급제하였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대과에 합격했으니,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소년급제’ 로 평가할 수 있겠다.
집현전서 벼슬살이를 시작하다
박중손은 대과 급제와 함께 정7품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알다시피 집현전은 세종이 학문 연구를 장려하고 학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치한 것이다. 집현전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고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모두 학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벼슬들이다. 세종 20년(1438) 28세 때에는 세종의 특명으로 서운관에 특채되었다.
“박중손이 천문에도 뛰어난 것 같으니 서운관판관으로 삼겠노라.”
세종은 농사에 도움이 되도록 천문을 연구하여 역법을 만들고자 했으므로 두루 인재를 구하였다. 박중손은 박학했기에 천문 관련 업무도 차질 없이 해냈다. 천문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조차 박중손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 후 사헌부 장령, 의정부사인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세종이 죽은 뒤 문종과 단종 때에는 승정원에서 군왕의 비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계유정난에 동조하고 4조 판서에 오르다
단종이 군왕의 자리에 오른 뒤 정치권력에 탐이 난 수양대군(세종의 차남이자 단종의 숙부)이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정변을 모의했다. 이때 박중손은 군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였다. 계유정난은 성공하였고, 박중손은 병조참판이 되는 동시에 정난1등 공신이 되었다. 박중손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후 상황과 그의 직임으로 볼 때, 단종과 신하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후 박중손은 대사헌(검찰총장)을 거쳐 공조,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세조 12년(1466) 5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역의 장명등이 국가보물이 되다
박중손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 시세에 따라 처신하면서 탄탄하게 벼슬살이를 했을 뿐이다. 이 묘역을 찾은 이유는 장명등 때문이다. 장명등은 분묘에 불을 밝히는 네모진 석등을 일컫는다.
석등은 원래 사찰의 불전 앞에만 세워졌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왕릉 앞에 건립되기 시작했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는 1품직의 사대부 묘역에도 세워졌다. 박중손 묘역의 장명등은 조선 초기 사대부 묘의 전형적인 형태로 평가받는다. 또, 그가 천문 분야에서 큰 공훈을 세운 것을 기념한 듯, 장명등의 동쪽 창(화창)은 해를 상징하는 원 모양, 서쪽 창은 달을 상징하는 반달 모양, 남쪽과 북쪽 창은 땅을 상징하는 네모 모양이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2001년 보물 제1323호로 지정되었다.
파주에는 보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박중손 묘 장명등이다. 장명등의 모양이 투박하면서도 귀엽다.
글·사진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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