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27) 파평윤씨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
수정 : 0000-00-00 00:00:00
제목: 파평윤씨의 성지, 용연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임진나루에서 되돌아 나와서 적성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전진교를 지나서 두포리에 이르면 우측 옛 도로로 진입한다. 조금 더 차를 몰고 가면 왼쪽으로 파평 면사무소가 나오고 방호벽을 지나서 우회전을 하면 파주 용연을 만나게 된다. 용연은 잘 가꾸어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이다. 연못이 비록 작지만 파평윤씨의 시조가 탄생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파평윤씨들은 성지로 여기고 있다. 파평윤씨의 시조와 관련된 전설을 살펴보자.
연못에서 비늘로 덮인 아이가 발견되다
신라 말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이다.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렸으나 신라의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에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하자 여기저기에서 농민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신라 멸망의 조짐이 파평 고을에서도 일어났다. 진성여왕 7년(893)년 8월 18일 한가위였다. 추수를 해야 할 시점인데 파평의 작은 연못에 안개가 잔뜩 끼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 작은 연못에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제사라도 지내야 할까 봐?”
마을 사람들은 3일 동안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 가운데 윤온이라는 노파가 연못 한가운데에서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건져냈다. 궤짝 안에는 오색찬란한 깃털이 금빛 광채를 발산하며 작은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윤 노파가 아기를 꺼내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양 어깨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점이 있었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있었고, 발바닥에는 북두칠성을 뜻하는 7개의 점이 빛을 내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尹(윤)’자가 새겨져 있었다. 윤 노파는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아기를 데려다가 길렀다. 이 아기가 성장해서 파평윤씨의 시조가 되는 윤신달이다.
윤신달이 후삼국 통일의 공신이 되다
윤신달의 탄생 전설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고려를 세운 왕건의 탄생 설화에 버금가는 내용이다. 마치 국왕의 탄생 설화 같지만, 윤신달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딱 한 줄만 나온다. 그것도 독립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윤관의 이야기를 전하는 열전에 삼한공신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윤관의 고조인 윤신달은 태조(왕건)를 도와 삼한공신이 되었다.”
윤신달에 대한 짤막한 기록으로 볼 때, 윤신달의 탄생 전설은 윤관의 업적 때문에 크게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신달이 ‘삼한공신’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쇠퇴해 가는 신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곳 파평에서도 일어났음을 방증하는 전설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윤신달은 왕건이 각 지방의 호족들을 융합할 때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파평은 더구나 왕건의 지지 기반인 송악(개성)과도 지리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파평의 호족 세력은 일찍부터 왕건을 옹호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파평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
“윤도현아, 노래하느라 힘들지? 이 더운 여름에 잉어찜으로 몸 보신 하러 가자.”
“야! 너는 내가 파평윤씨라는 것도 모르냐? 파평윤씨는 잉어 안 먹거든.”
파평윤씨들은 자신들의 시조인 윤신달이 용연의 잉어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윤신달의 탄생 전설에 나오는 비늘이 잉어 비늘이라는 것이다. 또한, 윤관이 여진족에게 쫓겨서 강을 건너야만 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잉어들이 모여들어 윤관의 도하를 무사히 도와주었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그래서 파평윤씨들은 잉어를 신성하게 여긴다. 만약 친구들과 잉어 요리를 먹으러 간다면, 그중에 파평윤씨가 있는지 꼭 확인해보시길.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