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역사교실 2부 (33) 고지전-캐슬 전투와 설마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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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캐슬 전투와 설마리 전투
문화재 명칭: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등록문화재 제407호)
제목: 한번 달아 보세요.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칠중성을 소개하면서 2000년에 걸친 전투사를 살펴보자고 했는데, 신문 지면의 한계 때문에 그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6・25 전쟁 때 치러진 칠중성 전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까지 가야 한다. 칠중성에서 내려와 의정부 방향으로 약 1.5km쯤 달려가면 된다. 요즘에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이라고 부르지만, 파주에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영국군 전적지라는 말이 더 친숙하다. 이곳이 영국군 전적지가 된 이유를 살펴보자.
6・25 전쟁에 중국이 개입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이 전차를 앞세워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함으로써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공세에 남한은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으나, 곧 16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하였다.
“야, 조금 있으면 남한과 북한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겠어.”
그러나 통일 정부에 대한 희망은 중국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도울 것이다. 그것이 중국의 가정과 국가를 지키는 길이다(항미원조 보가위국).”
캐슬 고지(칠중성)를 지켜라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제연합군은 평양을 다시 내주고 흥남 철수를 결행하였다. 이듬해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국제 연합국이 반격을 가하여 서울을 재탈환 뒤 38도선 일대를 중심으로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칠중성과 적성 일대에는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 1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영국군은 칠중성이 성(城)이라는 뜻이므로 ‘캐슬 고지(castle hill)’라고 불렀다. 1951년 4월 22일 오후 10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중국군이 임진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이 도하는 곳은 깊어야 허리까지 차는 곳 여울이었다.
“적이 공격해 온다. 총을 쏴라.”
중국군은 영국군의 기관총에 맞아 임진강에 쓸려 내려가면서도 계속해서 강으로 뛰어들었다. 비록 어두운 밤이었지만 중국군의 발걸음과 총알이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도하를 기다리는 중국군이 늘어만 갔다. 그와 반대로 글로스터 대대의 총알은 점점 소진되었고, 도하를 완료하는 중국군도 늘어갔다. 결국 이튿날 새벽 4시 영국군은 캐슬 고지를 중국군에 넘겨주었다.
이때 참전했던 안소니 파라-호커리는 “낫으로 풀을 베듯” 적병을 쓰러뜨렸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캐슬 고지는 6시간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글로스터 고지에서 목숨을 바치자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군의 파상 공세에 밀려 ‘글로스터 고지(235고지, 설마리 고지)’에 집결해 사주방어에 들어갔다. 즉, 중국군이 영국군을 뒤쫓아 235고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글로스터 대대장 칸은 여단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군 29여단은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필리핀 군대와 영국 전차대대로 하여금 협동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인해전술과 공세 때문에 글로스터 대대를 도울 수 없었다.
“자력으로 중국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라.”
글로스터 대대에게 내려진 마지막 명령은 스스로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의 공세에 맞서 3일 동안 저항하였다. 탈출 작전은 눈물겨운 싸움이었다. 59명이 전사하였고, 약 53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69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였다. 영국군 29여단의 30%에 해당하는 병력 손실이었다(위키백과, 설마리 전투). 포로생활을 하던 장병들 중 죽은 사람도 있고 휴전 협정 때 송환된 장병도 있다.
적성 전투에 대한 엇갈린 평가
중국군은 영국군에 비해 많은 병력을 손실했지만, 칠중성에 이어 설마리 고지까지 점령한 이 전투를 6・25 전쟁 중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영국을 비롯한 우리나라는 6·25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실시된 고립방어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국의 공세를 4일 동안 지연시켜 서울의 재점령을 막은 공로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여 1957년 6월 29일 설마리 전투비를 세웠고, 2014년에는 비속이 있는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추모 공원으로 확장시켰다.
글로스터 대대 장병들은 적군에 의해 사방이 포위되었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그들의 숭고한 군인 정신을 높이 추앙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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