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역사교실 2부 (34) 역사 속의 인물과 감악산 문화재 명칭: 감악산비(향토유적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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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역사교실 2부 (34)
역사 속의 인물과 감악산
문화재 명칭: 감악산비(향토유적 제8호)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 공원에서 나와 의정부 방면으로 가다 보면 감악산 출렁다리를 관광할 수 있는 대형 주차장이 나온다. ‘적성’ 하면 ‘감악산 출렁다리’가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출렁다리 너머에는 범륜사라는 사찰이 있고, 그 아래에는 운계폭포도 있어서 파주에 이만한 관광지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범륜사는 옛 운계사 터에 지은 현대의 사찰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관광만 하지 말고 감악산 정상까지 올라가 이곳에서 전개된 역사를 살펴보자.
설인귀가 감악산신으로 추앙되다
칠중성을 소개할 때 이야기했듯이 임진강과 적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인근 고을 주민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이곳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에는 감악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항간에 전해 오기를 ‘신라에서 당 나라 장수 설인귀를 산신(山神)으로 삼았다.’ 한다.”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시점에, 민간에서는 감악산의 산신으로 설인귀가 추앙되고 있었던 것이다. 설인귀는 중국 용문(지금의 산서성) 출신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였고 신라까지 공격한 인물이다. 신라 사람들은 이러한 인물을 왜 산신으로 받들었을까? 아마도 설인귀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그치게 한 인물로 평가받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즉,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이라도 산신으로 추앙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설인귀의 고향이 적성이라는 다소 어이없는 전설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석비가 감악산에 세워지다
감악산 정상에는 석비가 하나 있는데 글자가 모두 마멸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감악산비는 구전으로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글자가 함몰되어 있으므로 ‘몰자비’라고도 불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동국대학교 조사단에 의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박사님, 감악산비의 모양이 북한산비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도 있겠는걸.”
그러나 북한산비와 외형만 유사할 뿐 진흥왕 순수비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다만, 오래도록 전해지는 설인귀 전설, 북한산비와의 외형상 유사성, 삼국시대에 전개된 감악산 일대의 전투 등을 바탕으로 신라 때의 석비로 간주되고 있다.
김돈중이 감악산으로 숨어들다
고려시대에는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차별하는 정치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에 따라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을 비롯한 무신들이 장단의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무신들은 국왕을 호종하는 문신들을 보이는 대로 살육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신 정변이다. 이때 김돈중이라는 문신이 감악산으로 도망쳐 숨었다. 정중부는 김돈중의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김돈중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아들로, 일찍이 아버지를 믿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놀린 적이 있었다.
“김돈중을 찾아라. 김돈중을 찾는 이에게 상금을 내리겠노라.”
이 소식을 알게 된 김돈중의 하인이 정중부에게 김돈중이 감악산에 숨어 있다고 고변을 하였다. 감악산에 숨어 있던 김돈중은 무신들에게 사로잡혀 사천강(장단 판문점 인근 추정)까지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김돈중은 죽으면서 자신의 죽음이 당연한 결과라고 자인했다.
허목이 감악산에 올라 기록을 남기다
조선 시대에는 많은 선비들이 감악산에 올라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남인의 영수 허목(1595~1682)이 감악산에 오른 기록을 살펴보자. 현종 7년(1666) 9월 만추에 미수 허목이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감악산 유람에 나섰다. 정상에 오른 허목은 감악산비를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세 길이나 되는 단 위에 비석이 있는데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었다. 옆에는 설인귀의 사당이 있는데 왕신사라고도 한다. 그 신이 요망하게 화복을 내릴 수 있다 하여 제사를 받고 있다.”
허목이 감악산에 오른 그 시점에 설인귀의 사당이 있어서 제사까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자인 허목은 내력이 분명하지 않은 사당이라고 일축하였다. 어쨌거나 민간에서는 약 1000년 전의 당나라 장수를 감악산신으로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무속인이 감악산이 영험하다며 제사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설인귀사당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정헌호 (역사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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