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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㉟ 농부 소리꾼 백홍기와 백봉현 부자

입력 : 2016-05-11 11:30:00
수정 : 2019-01-18 17:43:24

 

“가화만사성 하옵소서 에~헤~라 지경요~”

 

 

백홍기 님(72세)을 만나러 보리출판사 ‘보리와철새 북카페’로 찾아갔다. 아들 백봉현(31세)님이  보리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마침 어린이날 행사 준비로 사내가 분주했다. 들어서자 백홍기님을 딱 알아볼 수 있었다. 순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어린이 책을 보고 계셨다.  

 

순도 100% 파주 사람 백홍기

 파주에서 나고, 파주에서 자라고, 파주에서 일하고, 파주에서 늙어가고 있는 노인이라고 당신을 소개하셨다. 향년 73세이다. 월롱면 덕은2리 368번지 월롱초교 근처에서 태어나서, 그 마을에서 자랐다. “조상도 거기 계시고... 마을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발을 못 뻗어봤지요.”라며 선하게 웃는다. 

 

백홍기님은 6남매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일정 시대 때 일본놈들한테 매를 많이 맞아서 폐가 상해서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어요. 48세 때. 제 나이 18살 때. 그리고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전쟁 끝나고 나서, 사는 게 힘드니까...병으로 돌아가셨지. 아버지 돌아가신 후 4년 있다가...” 

 

18살 장남이 진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동생 다섯을 모두 부양했다. “다섯을 다 키웠어요. 동네 공장 일도 하고, 모내기도 하고...” 

 

서울 가서 돈 벌까 생각하다가도 내가 떠나면 애들이 고생할 거란 생각으로 떠나지 못했다한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제철소, [선일금고], 자석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농사도 짓고, 남의 농사일도 도우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느라 장가 생각도 못했다.  

“장가갈 생각을 안한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아래 네 여동생을 다 시집보내고, 막내 남동생을 장가보내고. 그러느라 저는 늦게 결혼했어요. 36살에. 동네에서 마음이 착하고, 일 잘하한다고 좋게 봐줘서 중매를 해줘서 결혼했어요.” 

 

그 때 36살이면 노총각중에서도 상노총각이었을 나이. 지금 슬하에 딸 아들, 둘을 두고 있다.

“늦게 낳아서 그런지, 아이들이 무척 예뻐요. 효자예요. ” 서른 넘은 아들 딸에게 이쁘다는 소리 하는 아버지를 보는 게 흔치 않은 일이다. 둘 다 싱글이니 ‘결혼 안해서 걱정이라거나’ 부모 말 안듣는다고 푸념도 할 만 한데, 백홍기님은 싫은 소리 한 마디 없이 싱글벙글이다.  

2007년도에 문산 선유리로 이사 가서 자식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계시다.

 

일상에 노래하는 우리 민족의 유전자가 ‘소리꾼’

보리출판사 다니는 아들 백봉현님이 뒤늦게 아버지가 ‘소리꾼’이고, 이 무형의 자산이 무척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고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어 신문사를 두드렸다.  

 

어떻게 소리를 하게 되었을까? 백홍기님은 그냥 삶속에서 저절로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동네에 집을 짓거나, 모내기를 하거나, 누군가 돌아가시게 되면 품앗이로 모두들 모였다. 

 

“옛날에는 없이 살고.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품앗이 했어. 쌀 한 되씩, 한 말씩 갖고 와서 밥을 해서 먹고 산소까지 만들어주고 했는데. 지금은 돈이 있으니까, 병원에서 장례식장하고, 바로 화장터로 모시잖아요.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좀 냉정해졌어.” 

 

품앗이를 하러 모이면 꼭 소리가 있었다. 25년 동안 우리 민요를 수집하러 전국을 다니고, 외국까지 찾아다닌 최상일 피디(mbc라디오의 ‘우리 소리를 찾아서’제작)는 ‘신토불이’를 빗대어, 민요와 땅이 하나라는 뜻에서 ‘요토불이(謠土不二)’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에는 노래가 숨어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일상적으로 노래를 많이 하는 나라는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일하면서 여럿이 같이 부르는 노래가 많다는 게 우리나라 민요의 특징이라고 했다. 백홍기님도 마을에 살면서 저절로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동네에 최소성씨가 선소리를 잘했어요. 그래서 이 양반을 따라다니며 배웠어요.” 상여소리나, 산소 만들기 전에 다지는 소리를 듣고 나면 소리가 머리에 남았다. 그리고 혼자 배웠다. “배우려 한 게 아니라 들으면 들은 대로 머리에 들어가요. 여태까지 까먹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분 돌아가신 후에 내가 하겠다고 나섰더니 잘한다 해요.” 태평소도 동네에 온 남사당패가 하는걸 보고 혼자 배웠다. 19살 때. 다음 해에 온 남사당패가 놀라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우리민족의 ‘소리DNA'가 더 진하게 있는 것 같았다.

 

저절로 배운 상여소리, 지경소리

“상여소리는 시신을 매고 가면서 하는 거예요. 6명이 매는 데, 옛날에는 긴 상여틀을 만들어 동네에 두었다가 같이 쓰곤 했는데... 지금은 상여를 사서 쓰고 불 태워 없애버리고. 병원에서 장례식하고, 화장터 가니까...”

 

예전에 매실축제로 남도에 갔을 때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지나가던 꽃상여를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울고 불고’ 난리(?)치는 장면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황천길 가는 상여를 울긋불긋 종이꽃으로 장식하던 우리 조상들의 철학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사실 죽음이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직한가? 죽음이 없는 삶, 그것이 암이 아니던가!!  

 

“상여소리가 슬프지 않아요. 돌아가신 것도 슬프니까. 조금 신나게 잘 가시라고. 가끔 가끔 슬픈 곡 넣어요.” 백홍기님은 단 한마디도 반말을 섞지 않고, 자분자분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의 말은 어디서 주어든 지식이나, 문구가 아니라, 삶에서 녹이고 다듬고 깎고깎은 진실한 표현이었다. 

 

“소리가 자꾸 없어져요. 나 한테서 전수해서 배울 사람이 있으면 전하겠는데, 할 사람이 없으면 사라지는 거죠. 농악도 사람이 없어서 혼자 꽹과리하고, 북하고, 제비(원명은 ‘제금’이나 파주 사투리로 ‘제비’라 한다)도 해요.” 그래서 백홍기님은 혼자서 태평소 불면서 제비(제금)도치고, 북도 칠 수 있는 기구도 만들었다.   

 

집 터 다지는 소리(선소리)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자기 밭에다 마음대로 지을 수 있었잖아요. 집을 지으려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품앗이 했어요. 가래, 삽처럼 생긴 거. 그 가래 하나에 줄 3개를 해서. 가래로 30평 40평 정도에 흙을 긁어모아요. 그 다음에 큰 바위에 가마니를 덮어서 바(밧줄)로 엮어서  7~8가닥을 만들어요. 동네사람들이 모두 와서 들어서 땅을 다져요. 동네 사람들이 들었다 놓았다 하며 소리를 하지요. 그게 지경소리예요. 집 짓는 사람이 떡을 하고, 술하고 내놓고. 지금은 브로크나 세맨으로 짓지만, 옛날에는 나무로 지었잖아요.” 그 시절이 눈에 훤하신지 절로 소리가 나왔다. 무거운 지경돌을 여러 가닥의 동아줄에 나눠잡은 사람들이 지경요~ 소리에 맞춰 지경돌을 ‘쾅!’내려뜨리면서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때는 마을 장정이 모두 힘을 모아 집을 지어줬는데....

 

“에해여라 지경요~~

이 집 짓고 부자 되세요. 

에해라 지경요~~

아들 딸 낳고 잘 사시오. 

에혀라 지경요~

아들을 낳으면 효자를 낳고.

에혀라 지경요~

딸을 낳으면 효녀를 낳고.

에~혀라 지경요~

가화 만사성 하옵소서.

에~혀라 지경요~

노자노자 젊어서 노자.

에~혀라 지경요~

집을 지으면 잘 살 수 있네.

에~혀라 지경요~”

소리를 듣고 나니, 집을 이렇게 소리하면서 짓고싶어졌다. 

 

        .
 

“제가 12가지 재주가 있어요.”

다섯 동생을 키우고도, 정말이지 욕심 없이 살았기에, 백홍기님은 뵙는 것 만으로도 평안해지는 인상과 목소리와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든 시절을 이겨낸 사람이 이렇게 평화롭게 삶을 누리는 것을 느끼며 저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남이 하는 것, 보는 것 다 해요. 이발도 할 줄 알고, 대패질 끌질 목수일도 잘하고, 농사도 잘 짓고, 선소리도 하고...용접도 3가지 다 할 줄 알아요. 짚으로 하는 거, ‘영’엮는 거. 용마루 엮는 거. 닭집. 지게, 바스꼬리(지게 뒤에다 싸리로 엮어 얹는 거), 병아리망... ‘영’엮는거도 아주 잘해요.” 이렇게 쓰고 보니, ‘자랑하는 말’처럼 전달 될 수 밖에 없다는 문자의 한계를 느낀다. 조용조용 하시는 말씀이 자랑이 아니라, 그가 살면서 다져온 노동의 일생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소리 같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산다면, 그것이 비록 고된 일이라 해도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의 노동요가 그러하듯.

 

▲산남습지에서 태평소를 부는 아버지 백홍기와 아들 백봉현씨.
 

아버지와 아들은 세상 하나 가득이었다. 

지금 백홍기님은 문산 선유리에서 150여평 농사를 지으시면, 독거노인 돌보미 일을 하고 있다. 경로당에도 못갈 정도로 아프거나, 치매 끼가 있는 분 들을 1주일에 2번이나, 4번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건강을 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소원이 있냐고 여쭈었더니, 없다하신다. 다시 물었다. “건강한 게 소원이지. 애들 결혼은 해라해도 안하니까 신경안써.”라고 하신다. 너무나 편하고, 정말 세상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사람 같은(도인같은) 느낌이 들어 약간 따지듯 다시 물었다. “소원이 없을 수 있어요? 희망이요?” 

 

“희망이라는 게 사실은, 애들 일이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농사짓는 거, 돌보미 일 다니는 거 일다니고. 그럼 태평이야.” 웃으며 정말 한 티끌의 욕심도 없이 태평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농악에 쓰이는 여섯 악기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조분조분 말씀했다. 

 

“꽹과리는 잠자는 사람이나 힘이 없는 사람을 깨우는 소리이고, 장고는 어깨춤 추며 흥을 돋구는 흥 소리예요. 북은 농부들이 힘을 얻기 위해 다져주는 소리. 제비(제금)는 천기를 모으는 소리. 징은 마음을 뭉클하게 하면서 하소연하듯 애틋한 소리, 태평소는 태평소 말 그대로 농민들이 태평하면서 즐겁게 우러나는 소리. 춤도 추고 신나는 소리야.” 백홍기님은 여섯 가지중 장고를 가장 좋아한다했다. “장고가 흥이 나고 가락이 좋잖아.” 남에게 주어 들은 것도 아니요, 글에서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해석하고 자기 삶으로 녹여낸 악기 평론. 지금도 밭에서 일하다가 힘들면 혼자서 태평소를 분다고 했다. 그냥 소리가 삶에 붙어있는 거다. 

 

▲빨    '' ''
 

태평소를 불어준다고 밖으로 나왔다. 가방에서 나온 짐에는 빨래대를 잘라서 만든 피리, 빨래를 납작하게 해서 만든 ‘서’(피리 끝에 입으로 부는 부분, 통상 ‘리드’라고 부른다), 볼펜 손잡이를 재활용한 태평소 관대가 있었다. 50년 소리인생이 손으로도 이어졌다. 아들 백봉현님이 아버지를 촬영한다. 보리출판사의 유문숙 이사를 통해서 아버지의 소리를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다는 아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상여소리를 해주면 좋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옆에 있던 아들 백봉현님이 끼어들었다. “제가 하려고요.” 누나는 노래를 잘하는데, 자신은 박치라고 스스로 자백해 놓고도 아버지 상여소리를 하고 싶은 열망에 냉큼 답을 한거다. 아버지는 하라 말라 소리 없이 내게 말했다. “배우기가 어려워요.” 

 84년생 아들은 배울 수 있을까? 

 산남습지에 울려퍼지는 태평소가 세상에 꽉 차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 하나 가득이었다. 

 

                                                                 글 사진 임현주 기자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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