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역사(40 ) 13. 모색2. 경계에서 찾은 새로운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수정 : 2022-06-22 00:29:35
13. 모색2. 경계에서 찾은 새로운 길/ 연암, 다산, 풍석 그리고.
(1) 연암의 냇물에 새겨진 얼굴
▲박지원 초상. 연암의 냇물에는 그의 얼굴이 남아 있을까?
1771년 35세의 박지원은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이덕무, 백동수 등과 개성여행에 나선다. 이때 연암골을 대면하고 은거할 것을 생각한다. 박지원은 이때부터 연암을 호로 삼는다.
“영숙이 일찍이 나를 위해서 금천의 연암협에 집터를 살펴 준 적이 있었는데, 그곳은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하루 종일 걸어가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다.(박지원.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중에서)”
뒷날 박지원이 찾아들게 되는 금천의 연암협은 지금으로 치면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 장풍읍 남쪽마을이다. 제비바위가 있어서 연암동이라 부른다. 바위에는 박지원이 쓴 ‘소엄화계’란 글자가 새겨있다고 한다. 금천군에 속했던 연암동은 이후 장단군에 편입된다. 남북분단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그곳은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였다. 화장산 동쪽 골짜기 휴전선 가까운 곳이다.
박지원은 7년 뒤 가족을 이끌고 연암동으로 들어온다. 그는 정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당시의 권력자 홍국영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위험에 처한다. 결국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은거를 결행하게 된다. 그가 들어와 산 연암동은 어떤 모습일까?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 연암의 풍경이 묘사된다.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를 마련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박지원. 「홍덕보에게 답함」 네 번째 편지 중에서)”
박지원의 편지를 계속 따라가 보자. 집 앞으로 왼쪽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병풍같이 서 있다. 바위 틈 동굴에 제비가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제비바위 ‘연암’이다. 집 앞 100여 걸음 되는 곳에는 시내 위로 바위가 겹겹이 쌓여 솟아 있는데 ‘조대’라 한다. 시내를 거슬러 오르면 하얀 바위가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고, 맑은 못을 이루는데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린다. 이곳은 ‘엄화계’라 한다. 물가에는 정자를 짓고 ‘고반정’이라 이름 했다. 못 뒤로는 ‘하당’과 ‘죽각’이라 이름 붙인 건물을 세웠다.
▲개성시 외곽의 연암 묘. 평화문제연구소
박지원이 들어오면서 궁벽한 산골은 새로운 면모를 갖는다. 무엇보다 연암동은 조선을 빛낸 최고의 문장이 탄생한 장소가 된다. 열하일기가 여기서 완성됐고, 주고받은 편지들, 아름다운 시편들이 창작됐다.
“때때로 묘한 생각이 떠오르면 붓을 들어 써둔 것이 상자에 가득했다”
박지원은 나중에 이를 정리해서 책을 만들 생각이었다. 뒤늦은 벼슬살이에 계획은 미뤄졌고 그가 다시 연암동으로 왔을 때는 눈이 어두워져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박지원은 “안타깝다. 벼슬살이 10여년에 좋은 책 하나를 잃어버렸구나.”라고 탄식하고 종이를 시냇물에 세초한다.
그는 권력 핵심부 일원이었지만 벗어나 자유롭기를 원했다. 양반계급을 비판하면서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는 권력의 자장 밖으로 탈출하지만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행성의 자유가 유지되듯 그는 딱 그런 긴장 속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임진강은 중심과 변방의 경계에 있었다. 도성은 벗어나 있지만 소식은 전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박지원에게 연암동은 뒤늦게 들어온 곳이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험하고 동떨어진 곳이지만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박지원. 「홍덕보에게 답함」 네 번째 편지 중에서)”
살뜰하던 형수가 연암동에 들어가던 해에 세상을 뜬다. 그리고 9년 뒤에는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형 박희원이 죽는다. 당연히 형수와 함께 연암동에 묻는다. 박지원 역시 생을 마친 뒤 가까운 장단의 대세현에 묻힌다. 그의 묘지는 현재 개성시 동쪽 외곽에 자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암은 떠날 수 없는 곳이 됐다.
글을 세초한 연암의 냇물에는 박지원의 얼굴이 또렷이 새겨진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박지원.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
지금 냇물은 어떤 얼굴을 비추고 있을까? 연암일까, 다른 누구일까?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들은 달려가 한번 비춰볼 일이다. 연암은 지금도 경계에 있다.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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