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현 박사의 통일 문화 산책 ⑮ 북한의 토지개혁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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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의 주요사건-북한의 토지개혁⑴
▲해방 당시 북한 토지개혁 포스터
지난 번 칼럼까지 분단국들의 통일과정에 대한 얘기를 마치고 이번 호부터는 북한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남북한의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당 부분 잘못돼 있는데이는 남북한 당국이 체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왜곡해 전달한 데서 비롯됐습니다.향후 전개될 남북한 간 교류 ·협력의 과정에서, 또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과정에서 국력 우세에 있는 남한 국민들이 북한을 포용하는 것은 번영하는 통일 한국을 만들어나가는데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해방의 기쁨 그리고 현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환희와 벅참 그 자체였다. 이는 해방 직후 2주일 만에 145개의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이라는 한 번의 박동이 새로운 인물들로 이루어진 대안조직을 순식간에 동맥부터 미세혈관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곧 독립이고 따라서 우리 힘으로 새로운 근대민족국가를 만들겠다는 온 민족의 염원이 모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엄중했다. 해방된 조선의 지위는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전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는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현실화되었으며, 통일 독립정부 수립의 전망도 안개속처럼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해외로부터 귀국한 대규모의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해 실업이 만연하고, 극심한 소작제도의 모순은 하루하루의 일상을 힘들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당시 농업사회였던 조선의 소작농지는 1910년도에는 총 경지면적의 40% 정도였으나,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1945년 8월 경에는 거의 75%로 증가해 있었다. 1930년대 통계에 의하면 2.7%의 가구주가 전체 농지의 63.9%를 차지하고 있고, 전체 인구의 16.3% 만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작농이며 나머지 80%는 소작농일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광범한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며, 이는 구체적으로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이라는 과제로 제시되었다.
북한의 선제적 개혁 추진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해 일본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 한국인 정치조직의 결성을 후원했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정치장교 출신으로 해방된 식민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치스차코프는 후에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게 되는데, 당시 북한 지역에서 사회주의 국가 구축에 필요한 정책을 차근차근 집행해나갔다. 이는 뒤늦게 9월 8일 인천항에 들어와 첫 포고에서 ‘건준을 부인하고 일본식민지배기구의 존속’을 명령한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정치 감각이 결여된 조치와 대비되었다.
농업사회였던 해방 조선에서 토지소유구조의 불평등은 참을 수 없는 모든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 해결방안에 있어서 민족주의 진영은 지주제의 개선과 소작입법, 자작농 창설과 농업협동조합운동에서 찾았으며, 사회주의 진영은 소작제의 모순이 일제의 한국 지배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면서 근본적인 혁명을 추구하였다. 북한에서는 46년 3월부터 소련군의 후원 아래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급속하고 가장 철저한 토지개혁이 추진되었다. 유혈혁명을 거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서마저 5 ~ 10년 걸렸던 토지개혁을 북한에서는 6개월만에 뚝딱 해치워버린 것이다.(다음 호에 계속)
정치학박사 ?nbsp;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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