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28) 9. 율곡과 우계, 평생의 벗 (2) 같은 길에서 만나 같은 길에 누운 벗
수정 : 2021-07-01 12:15:02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28)
9. 율곡과 우계, 평생의 벗
(2) 같은 길에서 만나 같은 길에 누운 벗
▲ 동문리 율곡묘. 내를 따라 우계의 묘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있다.
“형과 나는 정은 형제간 같고 의리는 사우처럼 중하였습니다. 고향 산천에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형은 진택으로 돌아가시어 마음이 순하고 편안할 것입니다. 나 또한 곧 지하에 있는 형을 따라갈 것입니다. 동리와 향양리는 산이 연하여 서로 바라다 보이니, 행여 떠도는 영혼이 천추에 서로 접할 것입니다.(성혼 「율곡에 대한 제문」 일부)”
율곡이 49세로 운명했다. 병을 달고 살았던 우계는 율곡의 갑작스런 죽음에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만사가 끝났다고까지 했다. 율곡이 묻힌 동문리와 우계의 선산 향양리는 밤골과 소개울만큼 가깝다. 우계는 죽어서 영혼으로 만나기를 기약한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우계는 여전히 고향에 머물렀다. 율곡의 문집을 정리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시대는 그에게 전원의 한가로움을 허용하지 않았다. 임진년 전란은 은거선비의 삶을 뒤흔든다. 우계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북쪽 산천을 떠돈다. 뜻밖에 그 길은 다시 율곡에게 이어졌다.
“온 산에 눈보라 몰아치는 차가운 밤 서재에서/ 학문을 논하니 의미가 새로움 비로소 알겠구려. -나는 율곡을 30년 동안 스승으로 여기고 벗으로 사귀어 왔는데, 병든 몸으로 선생보다 오래 살아 난리를 만나 이리저리 유리하다가 이곳에 와서 강학하던 곳을 보니, 유적이 매몰되어 거의 찾을 수가 없었소. 다행히 문하의 제현들이 학문에 종사하려 하니, 유풍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할 만하였소.(성혼 「석담의 제현들에게」 중에서)”
우계는 전란 중에 관직에 나아갔지만 고질병으로 쓰러져 누운 뒤 율곡이 만년을 보낸 해주 석담에 몸을 의탁한다. 반년을 석담에 머물며 율곡의 가족, 제자들과 생활한다. 전쟁 중이었지만 제생들의 배우려는 유풍은 뜨거웠다. 율곡을 보낸 제자들은 새로운 스승을 모시게 되었고, 우계는 병든 심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제자들은 우계가 전쟁이 진정될 때까지 석담에 머물 것을 바랐다. 우계는 머뭇거린다. 우계는 그들의 경제적 부담을 염려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저녁 눈 내리는데 돌아가고픈 마음 간절하나/ 어지러운 산속에 외로운 그림자만 남아 있네/ 병화가 남쪽 변방을 휩쓰니/ 고향 소식 듣고자 북풍을 향하누나.(성혼 「석담에 우거하다」 일부)”
▲ 향양리 우계 묘. 율곡과 우계는 죽어서도 이웃으로 누웠다.
고민 끝에 죽어도 고향에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파산으로 돌아온다. 식솔도 거느리지 않은 채 홀로 결행한 귀향이었다.
몇 해가 지난 무술년(1598) 새해. 우계는 병이 깊어져 일어나 글도 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불운이 겹쳐서 살던 집이 불타고 화염 속에 서책을 잃었다.
“형세로 보건대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율곡 같은 대현은 한 번 열흘 정도 누웠다가 곧바로 서거하였는데, 나처럼 못난 사람은 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하니, 이 모두가 천명입니다.(성혼 「송운장에게 답한 편지」 중에서)”
그해 5월에 친구 이의건이 문병을 왔다. 죽음을 예감한 우계는 시를 지어 영결한다.
“한 번 그대를 보고픈 생각 간절하였는데/ 무궁한 속으로 떠나가면 온갖 일 공허하겠지/ 오직 상상컨대 해마다 산 달이 아름다워/ 깨끗한 빛 예전처럼 우계를 비추리라(성혼 「시를 지어 영결하다」)”
6월, 우계는 세상을 뜬다. 율곡의 제문에서 말한 대로 그는 파주 향양리에 안장됐다. 파산 앞 소개울(우계)을 흐른 냇물은 임진강을 거쳐 밤나무골(율곡)에 닿는다. 율곡과 우계가 살아 나누던 인연의 길이다. 율곡 산소가 자리 잡은 동문리를 떠난 샘물은 내를 따라 향양리에 이르고 우계의 묘를 스쳐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죽어서도 그들은 같은 산천에 누웠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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