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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9) 6. 양반들의 임진별서와 민중의 삶 (2) 인기 높은 별장지대, 임진강별서와 향촌사회

입력 : 2020-10-13 08: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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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9)

 

6. 양반들의 임진별서와 민중의 삶

(2) 인기 높은 별장지대, 임진강별서와 향촌사회

 

▲ 임진별서에 자리잡은 내포리 성현의 묘 별서는 양반들의 경제생활을 뒷받침했고, 죽은 뒤에는 유택을 제공했다.

 

임진강 저습지를 개간한 안목의 선조는 경북 순흥에 살던 향리였다. 조부 안향이 출세하면서 개성에 들어온 이후 도성과 배후지 장단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리고 임진강 하류까지 토지를 넓혀간다. 입신출세한 지방유력가들이 대체로 이런 과정을 거친다. 관료생활을 위해 도성에 집을 마련하고 도성 밖에 잠시 물러나 머물 별장을 장만한다. 이렇게 되면 시골집과 서울집, 별장을 갖춘 일가가 탄생한다. 많은 관료들이 이 대열에 참여하면서 수도권은 팽창한다. 임진강 일대는 유력한 집안의 별장으로 채워진다. 벼슬을 하려는 사람들은 도성 근처 후미진 구석이라도 차지하려 애썼다. 고려중기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치던 임춘은 벼슬 얻기에 실패한 뒤에도 도성주변을 맴돌았다.

가족을 데리고 은거하여 강해에 놀기를 원하오나 집을 지어 살려고 하니 아직도 얽어 덮을 재료가 모자랍니다. 감히 간절한 사정을 전달하오니 널리 용납하시기 빕니다. 이곳은 단수의 앞머리로 적성 서쪽가에 접하여 (임춘. 상이학사계중에서)”

벼슬아치들은 한 번 서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해 멀리 떠나려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중심은 한강변으로 이동했지만 한강에서 수로이동이 가능한 임진강은 여전히 별장지대로 인기가 높았다. 앞서의 개성여행기를 보면 채수의 여행은 성현의 장포별장에서 시작된다. 유호인은 여행의 마지막을 동행인 신종호의 낙하별장에서 보낸다. 벼슬을 버린 남효온도 자신의 판문별장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탁발승 행색을 한 김시습을 제외하면 무작정 나선 여행은 없었다.

성현의 장포별장은 임진강 연안을 개척한 안목과 연결된다. 성현의 아버지 성염조가 순흥안씨 집안에 장가든 것이 별장을 차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다. 성현은 자신의 가문을 당대 최고라 자부했다. 그의 집안은 도성 안에 정원을 갖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한강 가에는 읍취정이란 정자도 있었다. 출신지인 토산에 별서가 있었는데 혼인을 통해 임진강에 또 하나의 별서를 마련한다. 후손들은 지금도 문산읍 내포리와 당동리 일대에 모여살고 있다.

별서는 단지 잠시 머무는 집을 뜻하지 않는다. 일대의 전답을 포함한다. 별서는 양반들의 서울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양반들의 권력은 향촌의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됐다. 생산물의 잉여분은 대부분 서울로 들어갔다. 향촌사회에는 큰 부담이었다.

실바람이 돌아가는 돛을 보낼 제/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 울리어라/

철없는 애는 낯이 점점 펴질 테고/

아내는 응당 좋은 꿈을 꾸었으리/

이제부턴 말발굽 경쾌히 달려서/

동서남북 유람이나 실컷 하련다(성현. 진암에 올라서 바라보다일부)”

파주별서를 찾은 성현이 배에 양곡을 실어 서울 집으로 보내며 지은 시다. 양반들의 여유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미루어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물을 건너고 다시 산을 올라가니/

바위 골짝에 외딴 마을이 보이누나/

늙은 노복은 길에 나와 맞이하고/

어린 아들은 처마 끝에서 기다리네.(성현. 밤에 토산의 별서에 당도하다)”

이번엔 토산 별서다. 바위 골짝 외딴 마을에서 성현은 밤참을 먹으며 노복과 밤새 농사이야기를 나눈다. 시는 시골의 소박한 정취를 담고 있지만 처마 끝 어린 아이의 심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 동제를 준비하는 내포 4리 주민들. 지금껏 성현 집안의 후손들이 모여 산다. 

 

저동죽서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 최고 집터는 남산 아래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저동의 동쪽과 죽동의 서쪽이 제일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 저동죽서다. 조선후기 저동에서도 최고 저택은 서명선의 집이었고 죽서에서는 홍석주의 집이 가장 컸다고 한다. 이들도 모두 임진강에 별장을 두고 있었다. 서명선은 뒤에 임진강 일월봉 아래 묻혔고, 홍석주도 가까운 백학산에 묘가 있다. 임진별서는 서울 저택의 삶을 뒷받침했고, 죽은 뒤에는 이들의 유택을 제공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 저자

#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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