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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40) 우리에게 교육은 무엇인가

입력 : 2020-12-23 1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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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40) 우리에게 교육은 무엇인가

 

작가 전종호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사범(교육)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배우는 교육학개론은 교육을 정의定義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교육이란 무엇이고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그 답변은 이후 교육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교육자, 학습자), 교육과정, 교수학습이론, 평가체제와 이것들을 운영하는 행정체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정의는 가르쳐 기른다는 낱말풀이식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어서 여러 학자들의 규정과 논증이 뒤따른다.

 

       

 

피터즈(R.S. Peters)의 교육의 정의는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난해하다. <윤리학과 교육>에서 그는 교육을 문명된 삶의 형식으로의 성년식으로 규정한다. ‘문명된 삶의 형식가치있는 삶의 형식’, ‘공적 유산’,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과 비슷한 말로 변주되며, 적어도 교육이라 함은 첫째,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든다(규범적 기준), 둘째, 지식과 이해, 지적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인지적 기준), 셋째, 교육받은 사람의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하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온당한 것이어야 한다(과정적 기준)는 것을 뜻한다. 에밀 듀르켕은 <교육과 사회학>에서 교육은 어린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사회화라고 정의한다. 교육은 이기적, 반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집단적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존재로 형성하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출생할 때의 무기력한 존재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 또는 창조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수단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인간 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범모의 공학적 교육 정의이다. 이는 교육학을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한 조작적 정의로, 일상적 용어로서의 행동보다는 지식, 사고, 가치관, 동기체제, 성격특성, 자아개념을 가리키고, 변화는 육성, 조성, 함양, 교정, 개선, 발달등을 포괄하며, 계획이라는 것은 교육 프로그램을 뜻하는데, 교육목적과 교육이론, 교육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술記述적 범위를 넘어 강령적 정의綱領的 定義와 조작적 정의를 포함하는 학자들의 논의 방식과는 달리, 일반 대중에게 교육은 먹고사는 문제이며, 자식의 앞날과 관계된 것이어서 표현은 직접적이고 욕망적이며, 때로는 학자들의 주장과 맞서는 반교육反敎育에 가깝다. 우리나라 부모에게 교육은 교육학적이기보다 소설적이며 직설적이다. 소설의 한 대목이 대중의 교육적 정의를 대변한다.

 

 

엄마는 공부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다. 빨리빨리 공부해! 더 공부해!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해! ...엄마가 그 다음에 신나서 하고 또 하는 말이 있었다. 어쨌든 서울대학교에 붙어야 한다. 그래야 인생길이 고속도로가 된다. 서울대학교만 나와봐라, 세상 사람 기죽고, 척척 알아준다. 서울대학교를 나와야 큰소리 떵떵 치며 부자로 편케 산다. 그래야 쉽게 출세하고 큰 권세 잡는다(지원)(...)“수능 1점에 인생이 양지에서 음지로, 음지에서 양지로 엎어졌다 뒤집혀 졌다 하는데요.” B급 애들 중에도 엄마가 A급 사교육을 잘 시키고, 아이가 고분고분 A급 노력을 잘하면 A급 애들이 가는 대학에 들어가기도 해요.” “평생 겨우겨우 사는 것하고 풍족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일류와 삼류는 삶의 질이 달라요.(엄마)”(조정래, <풀꽃도 꽃이다>, 발췌 인용)

 

대중에게 관습은 헌법보다 상위에 있다. 욕망은 이성에 선행한다. 피터즈(R.S. Peters)가 말하는 교육의 내재적 정당화의 논리는 애초부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교육학 이론이 아니라, 학부모들 사이에 도는 소문과 주장, 부모들 사이에 공유하는 생각이 내 새끼를 교육하는 현실에서 더 규정력이 있다. ‘가치 있는 삶의 형식으로 입문한다든가, 집단적 의식의 사회화라든가, 계획적인 행동의 가치적 변화라든가 하는 것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에 불과할 뿐 부모에게 교육은 제 자식의 출세고 지위획득이고 계급상승인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는 줄기차게 달려왔다. 잿더미 속에서 고층빌딩으로 도시의 숲을 만들었고, 식민지와 분단국의 지위에서 경제 규모 10위를 다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미국의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이나 덴마크의 그룬트비히(Grundvig) 같은 교육 선구자는 없었다. 만인의 평등 장치로 교육을 기획하거나, 교육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부흥과 기초를 다지는 사람은 없었다. 남의 나라 사상가 죤 듀이는 우리 교육 현장에 수시로 호출되었으나 학교가 민주사회의 축소판이며, ‘생활 속 민주주의 실현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독재정권의 양두구육이 되었고, ‘아동 중심’, ‘경험 중심의 진보주의는 발전교육론자들의 국가 중심’, ‘경제 중심의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교육과 교화敎化는 구별되지 않았고, 오히려 주입과 교화가 교육의 본령이 되었다. 국가는 경제개발에, 국민은 해방 공간에서 신분 와해의 빈틈을 비집고 계급과 신분 상승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해방된 지 이제 70년이 넘었다. 국가도 어느 정도 정상의 자리에 섰고, 국민도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졌다. 그러나 양극화 심화와 상대적 박탈감으로 국민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다. 사회의 상층부 지위와 부의 쟁취를 향한 교육경쟁은 오히려 가열차게 타오르고, 사교육과 공교육이 통합된 스카이 캐슬은 저들끼리의 스카이 체인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의 적성과 능력과 가치관에 기초한 교육이 아니라 욕망에 터한 계급상승 또는 계급 유지의 관점만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과 능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최근으로 올수록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갖게 되는 소프트 스킬이 강조되고 있다.(...) 하드 스킬과 달리 소프트 스킬은 계량화하기 힘든 주관적 스킬이다.(...) 핵심 소프트 스킬은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소셜 스킬, 정보와 감정 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자기조절능력, 자신감과 자기효능감 등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자아 관념, 비판 능력과 문제해결, 의사결정 등을 의미하는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 등이다. 이 가운데 소셜 스킬은 최근으로 올수록 직업 세계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하버드대 데이빗 데밍 교수는 “1980년부터 2012년까지 분석한 결과, 높은 소셜 스킬이 필요한 직업들이 미국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10%P 증가한 반면, 수학적 능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소셜 스킬이 부족해도 되는 직업은 3%P나 줄었다.”고 설명했다.(선대인, <일의 미래>, 212)

 

이제 멈춰서서 우리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 급박한 경제개발의 시대에, 숨 가쁜 빈곤 탈피의 시대에 우리가 놓친 교육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교육을 지배해 온 기본적 메카니즘이 무엇인지 밝히고 문제점을 찾아내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명해 보아야 한다. 학교민주주의의 현실을 진단하고 개선 방법을 찾아야 하며, 교육의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한 시험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외 성공한 혁신사례를 공유하여 그 철학과 방법과 내용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인류사적 재난 앞에 적자생존의 논리나 각자도생의 논리를 넘어 생존을 위한 교육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 교육이 국제적인 표준과 경향을 따라가는지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고 한다. 제목이 쉼이 필요해. “자꾸자꾸 재촉하지 말아요/나도 진짜 바쁘단 말이에요/학교 끝나면 방과후에/영어학원 수학학원/그냥 뭐 노는 줄 아나요/나도 쉼이 필요해/푸른 파도 속에/마음껏 헤엄치며 놀고 싶어요/나도 쉼이 필요해/넓은 들판에서/마구 뛰놀고 싶어/(...)” 아이고야! 마음이 짠하다. 반대로 돌봄과 교육에서 완전배제된 아이들 또한 적지 않다.

교육의 입문 초기에 묻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교육의 매 단계마다, 사회의 전환기마다 다시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아이들은 쉼이 필요하고 학생들은 생각이 필요하고 어른들은 성찰이 필요하며 국가는 장기적인 계획과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학습노동에 강제동원하기 전에 급변하는 미래에 아이들의 삶을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가 조용히 묻고 성찰해야 한다. ‘벌새의 물 한 방울로 산불을 끌 수는 없다. 그러나 벌새가 물고 온 물 한 방울이 땅을 적시고 내가 되어 바다를 이루는 꿈은 안데스 숲의 일만은 아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으나 함께 이룰 수 있는 일을 잠잠히 물러나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교육칼럼 <풀씨>와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널리 퍼진 풀씨들과 함께 우리 교육의 지평을 확장하는 역할을 계속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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