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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24) 능력주의의 허울

입력 : 2020-08-21 10:14:40
수정 : 2020-08-27 10:51:39

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24) 능력주의의 허울

 

 

작가 전종호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저자

 

 

이미 우리나라는 졸업장 병(diploma disease)’이 문제가 되는 학력사회를 넘어 학벌사회로 진입했다. 소득과 자산의 세습은 자본주의 국가의 세계적 현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교육이 그 매개 고리라는 것도 밝혀졌다. 토마 피케티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계층구조에서 소득과 부가 교육을 통하여 어떻게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이전되는지 분석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는 어쩌면 한국의 현실을 분석한 것 같다고 할 만큼 미국과 한국의 불평등 구조의 유사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출처 httpsaaronjelcock.wordpress.com20150317the-myth-of-meritocracy-in-britain

 

학벌주의의 기저에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깔려 있다. 능력주의 또는 업적주의는 전통사회의 귀속주의의 병폐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보상체계로 등장한 근대적 개념이다. , 권력, 명예와 같은 사회적 재화를 혈통, 가문, 신분, 계급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분배한다는 생각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확실한 분배 정의의 상징이 되었다. 왕조시대와 식민시대의 봉건, 반봉건 질서가 무너지면서 능력주의는,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의 입신양명의 정신처럼 해방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사회에서 개천에서 나온 용이 되고자 하는 능력 있고 야망 있는 젊은이들의 입신출세주의로 변모하여 개인의 출세와 사회의 발전을 앞당기는 핵심적인 에토스 역할을 했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 능력을 계발하면 성공한다는 능력지상주의적인 신념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와 함께 국민적인 신앙이 되었으며, 교육의 수익률에 눈 뜬 선각적인 부모들은 땅 팔고 소를 팔아서라도 될성부른 자식들을 무리해서 대학에 보내게 된다. 이른바 우골탑 신화다. 이러한 능력주의 신념에 의한 사회 계층의 재편은 60년대생들이 사회에 진입하면서 완성이 된다.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2019>는 한국의 소위 86세대가 어떻게 30년대생 산업화 세대를 물리치고 사회 주류가 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저작으로, 60년대생들의 사회진출과 승진, 정치권과 경제계에서 기득권 세력이 되어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86세대들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능력주의의 역설 또는 배반 현상이 나타난다. 즉 능력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거나 소위 능력이라는 것이 선천적으로 누구나 타고나거나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 또는 계급에 따라 타고나서 세습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을 신장시키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이기 때문에 교육이 매우 중요한데, 바로 교육제도가 능력과 지위의 세습 기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조귀동은 <세습 중산층 사회(2020>에서 86세대 중 학번을 가진 사람들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들인 90년대생 세대 내의 불평등 구조를 밝히고, 한국사회가 세습중산층 사회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불평등의 문제는 세대 간의 문제가 아니라 90년대생 세대 내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이 차지하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 재직자나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2차 노동시장의 분절적 이중구조인데, 1차 노동시장은 소위 서울 소재 명문대 학생들로 채워지고, 2차 노동시장은 지방대학과 고졸이하 노동자로 충원된다. 그 비율은 대략 20:80이다. 크게 보면 인 서울 대학과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 출신들의 급여 차이의 경향성이 나타나고, 자세히 살펴보면 서울 소재 대학 안에서도 입학성적 별로 대학 간 임금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학이 서울 소재 명문 대학과 나머지대학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극심한 이중선별 구조가 형성된 것은 200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50년대생의 자녀인 80년대생부터이며 60년대생의 자녀인 90년대생에 와서 그 경향이 더 가팔라졌다. 명문대의 입학 여부와 첫 직장에 따라 사람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학부모들은 사교육을 통해서라도 자녀들을 명문대학을 진학시키려고 사활을 건 노력을 경주하였고, 내 아이든 상위권 명문대에 진학할거라는 근거 없는 신념과 함께, 그렇게 얻은 지위는 불평등하더라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며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사회보상체계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조귀동은 대졸자직업능력이동조사를 이용하여 서울 4년제 대학과 지방 2-4년제 대학 출신의 취업 1년 후 소득을 비교 분석하였다. 결과적으로 서울 소재 대학은 입학 성적 상위 40%의 대학 출신까지 소위 번듯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지방의 경우 상위 20% 정도가 번듯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데, 그 수치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의치대, 약대, 로스쿨, 카이스트나 포스텍 등의 졸업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핵심은 부모 소득이 상위 20%에 속할 경우 자녀소득도 상위 20%에 속하게 되는 비율이 급격히 상승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서울 소재 대학, 그중에서도 명문대학에 입학할 가능성과, 상위 20%(9, 10분위) 소득에 위치할 가능성을 결정한다. 또한 상위 20%20대는 자신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믿고, 이에 만족하고 있으며, 이전 세대에 비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경쟁과 자율을 신봉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무조건 부정의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불평등은 정의롭다고 인식되는 차별적 분배원칙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이념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원칙과 결부된 평등주의적 전제 위에서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등적 분배를 그 원칙으로 삼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 사회성원들 사이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다. 헬조선이라고 아우성치는 보통의 젊은이들의 목소리와는 큰 거리감이 있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고 세습 자본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상류층의 부모들은 상대적으로 이혼율도 낮고, 임신 출산도 계획적으로 할 수 있는 정상가족안에서 자녀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계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경영능력과 그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능력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세습 중산층의 자녀들은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조기유학을 통해 외국어능력 및 교양, 좋은 품성(비인지적 능력) 등을 가지고 명문대학을 거쳐 1차 노동시장을 합법적으로 독식할 수 있게 되었다. 온 국민이 사교육에 목을 걸고 있으나 사교육의 실질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스카이 캐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이제 사교육으로는 세습자본주의 사회를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의 능력지상주의적 차별화는 다른 나라보다 더 유별나고 극단적이다. 능력주의 이념은 차라리 유사종교 같다. 학벌주의와 결부된 능력주의는 많은 병리현상을 수반한다. 미친 사교육 풍조, 대학 서열화, 공교육의 입시학원화, 세계 1위의 청소년 자살률, 아우성치는 헬조선의 목소리, 사교육비에 함몰되는 노후 빈곤 증대, 확대되고 심화되는 국민적 열등감 및 열패감 등등.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충격적인 증상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능력주의가 교육본질의 회복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고유성이나 개성은 무시되고 철저하게 성적이라는 단일의 기준에 따라 평가함으로써 학교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자아탐구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 함양 같은 진짜 중요한 교육적 요소들을 쫒아내 버리는 것이다.

이미 부르디외는 권력과 경제력을 세습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능력주의라는 통로를 통해서 부를 세습시킬 거라고 경고해 왔다. 벌써 30년 전에 시험 점수나 등수 때문에/ 자신이 바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정말 처음이라던 혜영이/ 아아 어두워지는 교실에서/ 마지막 책걸상을 정돈하는/ 주번 아이들마저 돌려보내고/ 쓰라린 가슴으로 창밖을 보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피맺힌 유서 남겨놓고 목숨 끊은/ 어린 열다섯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 나라 푸른 하늘 보기가/ 그만 소름끼치도록 무서워진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자살한 제자 앞에서 시인 정영상이 느꼈던 참담함과 바람과는 정반대로 세상은 가고 있다.

 

능력을 가장한 학벌 세습주의를 타파할 것인지 완화해 나갈 것인지는 이제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입시 제도를 점검하고, 기회 불평등 요소를 시정하거나 보완해주고, 사회임금체계와 조세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모두 필요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학벌주의의 최고 수혜자인 최상층 계급에 의하여 장악되지 않도록, 온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힘들어도 의식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시민교육의 발걸음을 한 발 떼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나 허약해 빠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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