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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옛날이야기 ⑧ 소설과 영화 속에서 만나는 파주

입력 : 2016-04-28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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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 속에서 만나는 파주

 

▲ 1967년의 임진강건너에서 본 섭저리풍경 중앙이 지금의 율곡리 전원마을

 

소설 속에서의 파주

“섭저리서 왔다는데 섭저리가 어딘가 몰라..” (소설 생인손 중에서)

양반과 종의 딸이 바뀐 운명으로 사는 개화기 민초의 이야기인 생인손(한무숙 작)에서 언년이의 딸이 시집간 파주 대감댁이 섭저리(섭절)이다. 

소설 속에는 적성의 섭저리라고 했는데 100여 년 전 개화기 무렵 파주에서 섭저리라는 명칭으로 부르던 곳은 지금의 율곡습지 부근 마을이다. 

 

▲당시 영화 촬영 중인 1977년 임진나루

 

영화 속에서의 파주

“나는 13대째 동파리 동리원동에서 살아왔수다 (영화 비목 중에서)”

전쟁을 피해 임진강 건너로 피난 나온 노인 윤구는 고향이 보이는 파평면 화석정 마을에 3대가 모여 산다. 

윤구는 전쟁 때 고향마을을 지키겠노라며 인민군과 싸우러 나간 둘째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비통함속에 그리워한다. 

이 영화는 이름도 없이 죽은 무명용사를 기리는 노래 ‘비목’을 실제 파주 지명과 고증을 살려 만든 영화로 1977년 무렵에 파주에서 촬영하였다. 영화 속의 실제 인물이 현재 파평면 두포리에 생존해 있다.

 

▲1960년대 진동면 동파리. 우측상단 절벽 그림자가 있는 곳이 임진나루

 

한시 속에서의 파주–동파역(東坡驛)

여관 잠을 잔 것이 그 며칠이던고.(逆旅知幾日)

객지에 나온 때가 바로 오월일세.(客行五月時)

(서거정의 한시 동파역 중에서)

 

선조가 비오는 밤 임진강을 건넌 후 머물고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신, 북쪽 지방에 파견이나 시찰 가는 관리들이 머물렀던 동파역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 임에도 불구하고 위치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은 기능이 왕성할 때는 50명이 넘는 역리와 역노비가 상주했고 말들이 14필이 있을 만큼 큰 곳이었다.

 

그동안 동파역의 위치를 연구해왔는데 개인적 견해로 사진 상의 중앙쯤에 있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근거는 조선후기의 각종 지도표기, 옛 문헌에서 의주대로와 장단 및 임진나루와의 묘사한 한시와 여행기, 고종 33년에 칙령으로 역이 폐지된후 용도변경, 일제강점기에 민간불하 기록, 전쟁 후 군사시설 건축시 관청양식 건물잔해, 전쟁 전에 진동면거주 주민의 취재 등의 찾은 자료로 볼 때 동파역은 초평도 바로 옆 동자원과 잔골사이의 주막거리에 있었던 추정된다.

 

▲ 1970년대 문산 부근의 초가집 마당의 대마들

 

뜻밖(?)의 파주

통일로 5구간 파주-문산, 대마초연기를 가장 먼저 뿜어 올린 이곳 한구석은 어지러운 역사의 변소같은 곳이기도 하다.(1977년 10월 경향신문)


지금은 키우기만 해도 중대한 마약사범이 되는 대마가 70년대 초반까지 파주에서는 마당에 울타리치듯 많이 심었다. 1960년대 중후반까지 파주에서는 대마초를 만들어서 미군들에게 10g에 500원씩 팔아서 수입을 올리기도 했는데 당시 마약관리법에는 대마는 포함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대마초 판매를 합법화하는 국가가 늘어가지만 그 시절 파주에서 대마초는 공산당과 공통점이 있었다. 산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면 보이지만 가까이해서는 안 되고 한번이라도 엮이면 쇠고랑 차게 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슷하였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3리 사람 김현국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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