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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2>  4. 고려와 조선의 갈림길(3) 두문동, 임진강을 등진 사람들

입력 : 2020-02-22 09:38:27
수정 : 0000-00-00 00:0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12> 

 

4. 고려와 조선의 갈림길 

(3) 두문동, 임진강을 등진 사람들

 

▲ 연천 삼화리 두문 벼랑골 
 

조선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태조 이성계는 실의에 빠진 고려유민들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시험을 치를 것을 명한다. 이 소식을 접한 임선미, 조의생, 맹씨 등 3인은 태학생들에게 시험거부를 제안한다. 태학생들은 뜻을 모아 추동(태조 이성계의 집) 동쪽 언덕에 관을 벗어놓고 갈대 삿갓을 쓴 채 개성 서쪽 만수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산 입구를 닫아걸고 두문동이라 했다. 3년 뒤, 태조는 개성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한다. 행렬이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왕이 신하들에게 일렀다. “옛날부터 백성을 바꿔서 임금이 된 사람은 없다. 내가 어찌 다시 과거 보이는 것을 아껴서 개성의 부로들을 위로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이때도 과거를 보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분노한 왕은 개성사람들이 벼슬에 오를 수 없도록 자격을 박탈한다. 나아가 이들이 향후 우환거리가 될까 두려워 만수산을 불태운다.

김택영의 숭양기구전에 전하는 두문동 이야기다.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유자들에게 불사이군의 충절은 계율과도 같은 가치였다. 길재처럼 미리 알고 떠난 사람이 있고, 뒷날 이러저런 핑계로 은거한 사람이 있다. 태학생들은 이들의 개인적 결단과 달리 집단은거를 결행한다. 정치의 혼란에 맞서 일종의 동맹휴학을 한 셈이다. 태학생은 과거를 준비하며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청년정치지망생들이다. 태조는 처음엔 젊은 치기쯤으로 생각하고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한양으로 천도할 즈음에야 이들을 떠올린다. 고려유민을 버리고 간다는 께름칙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을 불러내 등용할 생각으로 다시 과거시험을 명한다. 그러나 나오는 이들이 없었다. 그들은 불길 속에서도 두문동을 나오지 않았다. 한 치의 타협이 없는 비폭력 무저항 투쟁의 역사적인 한 장면이라 하겠다. 이들 태학생이 모두 불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개성지역 전승과 단편적인 기록만이 전해질 뿐 공식적으로 이들은 조선역사 내내 잊힌 존재였다.

 

▲ 임진강에도 두문동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 있다

 

이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3백년도 더 지난 1740년 영조 대에 와서다. 영조는 개성에 있는 정종의 후릉에 참배하기 위해 임진강을 건넌다. 후릉을 향하던 영조는 두문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다. 영조는 태학생들이 넘어간 부조현 고개에 멈춰 서서 이들을 기리는 시 한 구를 내린다.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그리고 직접 부조현이라는 글자를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한다.

개성에 들어와서는 과거시험을 보게 한다. 개성을 제왕의 고향으로 여겨 대우하며 급제한 이들을 서용하라는 명령도 내린다. 태조의 가혹한 조치에 대한 뒤늦은 위로인 셈이다. 물론 이는 조선초기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유민은 더 이상 조선의 우환거리가 아니다. 살뜰하게 보살펴야할 왕의 백성일 뿐이다. 전 왕조에 충성한 태학생처럼 현재의 백성들도 왕조에 충성을 바치라는 훈계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짐짓 숨겨왔던 두문동 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문동에 한쪽 발이라도 걸치면 의로운 선비 집안으로 인정됐다. 알려진 사람은 임선미, 조의생, 그리고 이름이 전하지 않는 맹씨, 셋뿐이었지만 어느덧 72현의 명단이 나돌기 시작한다.

김택영은 두문동 72현에 대해 논증하면서 이들이 당대의 명망가들이 아니라 젊은 태학생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태학생이라 했으니 이미 조정에 섰던 제공들을 섞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학자의 객관적 논증도 뒤늦게 나타난 현자들의 이름을 지우지는 못했다.

 

▲ 개성의 두문동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진강은 더 이상 결단의 강이 아니었다. 나루에 선 사람들은 등 뒤 개성을 돌아보며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조선은 임진강을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피가 돌았다. 이들이 아니면 조선은 당장에 말라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피를 만드는 자양분은 강을 등지고 숨은 자들에게서 찾았다. 두문동이 의로운 것이라면 그곳을 불태운 태조의 처사는 냉혹한 것일 터. 하지만 영조는 왕조의 가혹함에 대한 한 마디 사과 없이 두문동만을 떼어내 추앙했다. 후손들 역시 그것을 비극적 희생으로 생각하기보다 가문을 빛낸 영예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임진강의 시간은 고려를 떠나 조선으로 깊숙이 흘러들었다.

 

 이재석 /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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