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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현 박사의 통일 문화 산책 ⑯ 북한 현대사의 주요사건 - 북한의 토지개혁⑵

입력 : 2015-08-13 12: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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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의 주요사건-북한의 토지개혁⑵

 

▲토지 개혁에 기뻐하는 농민

 

북한의 토지개혁은 봉건잔재를 청산해 근대화의 기초를 쌓았다는 점에서 또 남북의 이념적 분단과 뒤이은 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세계사에서 유례 없는 급진적 혁명

북한의 토지개혁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급진적 혁명이었다. 해방 이듬 해인 46년 2월 8일 북한에서는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여기에서 일제 및 친일반동분자와 대지주 소유토지의 국유화와 소작제도 철폐, 그리고 무상분배의 3대 원칙이 결정되었다. 이어 3월 5일에는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무상몰수·무상분배와 경자유전의 방침이 천명되었다. 5정보(15,000평)이상의 토지를 가진 사람은 지주로 규정되어 몰수되었는데, 친일파와 우파들도 민족반역자로 규정되어 이들의 토지도 몰수되었다. 북한의 총경지면적 중 절반에 해당되는 1백만 325 정보가 몰수되어, 98만 정보를 72만 가구에게 분배하였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할 때 300만 농민이 토지를 분배받은 셈이다.

 

토지개혁의 주체는 공산당과 농촌위원회였는데, 지주와 민족 반역자로 규정된 사람들은 토지 이외에도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 기르던 가축, 농업기구, 주택까지 몰수당하고 기존의 거주지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었으며 타군으로 이주해야만 자경이 허락되었다. 결국 이들 대다수는 이주자경을 포기하고 분계선을 넘어 월남하였는데, 남하의 방임과 유도는 북한 당국이 혁명을 쉽게 하기 위한 저항계급에 대한 축출정책이었다. 또한 국가 기구내의 반사회주의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빠르게 정리했는데, 김일성 일파에 대한 46년‘3.1절 폭탄투척"사건을 계기로 4월까지 북한의 군·치안기구·법조계 등 관료 기구에서 반동이라 지목된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남한에서도 토지개혁 농촌에서 지주계급이 사라져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은 남쪽에도 전해져 남한의 토지개혁을 압박하였다. 지주들과 민국당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47년 이후 적극적 입장을 취한 미군정 정책,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리더십 등으로 남한에서도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이뤄졌다. 50년 봄 확정된 최종 법률안은 3정보 소유한도를 기준으로 지주에 대한 보상은 평년작의 15할을 5년 균등분할로 하되 정부보증금 등록식 융통증권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하며, 분배받은 농민은 평년작의 15할을 5년 균분으로 매년상환하는 방식이었다. 실제 토지개혁은 시행규칙이 공포된 50년 4월 28일 이전에 대부분 진행되었으며, 약 1/3의 지주들은 자작농이나 소작인들에게 사적으로 매도했지만 법적 상환율을 넘어 고가로 매각할 수는 없었다. 베링턴 무어에 의해"급진공산주의와 반동적 지주 양자 사이를 뚫고 성공한 위로부터의 개혁과 보수적 근대화의 드문 사례"라고 평가받은 토지개혁의 결과, 한국농촌의 계급구조는 파괴돼 지주계급의 권력은 종식되었다.

 

북한의 혁명은 남한을 반공국가화하는 데 기여

한편 북한의 토지개혁과 친일파 및 우파에 대한 숙청은 남한을 반공국가화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남한을 반공의 교두보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미군정은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경찰 ·군 등 국가기구의 주요 보직에 임명했는데, 1946년 당시통계에 의하면 경찰의 경우 경위 이상 고위경찰 1157명 중 일제 경찰 출신이 무려 949명(82%)에 이른다. 여기에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들이 가세하면서 국가기구의 반공적인 성격이 극단화되었다. 또한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들은 종교·사상·언론 등에서도 남한을 반공국가화하는 데 기여를 했으며, 일부청년들은 서북청년회를 만들어 해방정국에서 우익의 행동부대로 활약했다. 남한에서만 탁치(신탁통치) 갈등과 단독정부 구성 과정에서 10만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했는데, 서북청년회는 각종 테러와 잔혹행위를 주도함으로써 해방정국에서‘악의 꽃"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로 인해 남북은 미 ·소 외세에 의한 국토의 물리적 분단에 뒤이어 이념적 분단이 이뤄지며 결국 50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졌다.

 

 

정치학박사ㆍ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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