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개 선생의 파주이야기 <2> 월롱산성, 만주족의 탄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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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개 선생의 파주이야기 <2>
월롱산성, 만주족의 탄생(2)
서인정권의 선명외교
광해군의 위험한 줄타기를 문제 삼아 서인세력들이 광해군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인조반정입니다. 서인정권이 표방한 정책은 줄타기외교가 아니라 선명외교.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야한다’. 당시 누루하치가 몇 번이나 중국을 공격하다가, 영원성이라는 데서 홍이포(대포)를 맞아 부상당해 죽고 2대 통치자 홍타이지가 청태종이 됩니다.
홍타이지는 안정적인 통치를 하기위해 몽골과는 되도록 군사적 마찰 없이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주적인 중국과 싸우려면 그 배후에 있는 조선을 굴복시켜야한다는 노선을 세우게 됩니다.
홍타이지가 형 다이산을 파견해서 조선을 제압하려던 것이 정묘호란이고, 이후에도 조선이 여진과의 적대관계를 더 노골화하자, 청태종이 직접 전쟁에 참여한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이 병자호란 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누르하치 ‘나는 문수보살의 화신’
2차 병자호란때, 청태종이 직접 전쟁에 참여해서,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전에 월롱산성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죠.
청나라는 불교를 숭배했던 민족입니다. 북방불교는 우리나라 불교와 성격이 다릅니다. 중국, 조선의 불교는 정치권력에 대해 거리를 두는 반면, 북방불교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정치자의 행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누루하치는 죽기전까지도 늘 “나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다”고 얘기했어요. 문수보살은 부처님 옆에 있는 협시보살인데, 이 분의 형상은 항상 한 손에 예리한 칼을 들고 있고, 사자를 타고 있어요.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예리한 칼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사자를 탄 것과 같은 기세로 수행을 하라고 말합니다. 문수는 용맹과 지혜의 상징입니다. 누루하치도 용맹과 지혜를 컨셉으로 했어요.
월롱산에서 "조선에 3일을 주다"
월롱산 정상에서 북한산의 정경이 굉장히 잘 보입니다. 월롱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문수보살로 보였습니다. 아버지 누루하치를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치러 왔는데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은 지혜로 풀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조선인의 마음을 얻는 것. 저항의식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 이런 심리전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월롱에서 구파발까지 30분이면 도착을 합니다. 한양 공격이 반나절이면 가능한 상황에서 군대를 월롱에 주둔을 시키고 조선에 3일간의 말미를 주고 협상을 하며 ‘저항이든 항복이든 조선이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세자는 강화로
그러나 조선왕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가고, 세자는 강화도로 피신합니다. 홍타이지는 한 부대는 세자를 쫓아 강화도를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남한산성을 공격하도록 합니다.
조선의 민중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습니다. 의병들도 많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안했어요. 고립된 남한산성을 그냥 보고만 있던 겁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됩니다. 보통은 왕을 죽이는 것이 관례이나, 인조는 절을 하고 목숨을 연명했지요. 홍타이지는 인조를 살려주면서 왕의 권위가 약화되고 무력화되도록 하였던 겁니다.
홍타이지의 이 전략은 월롱산성에서 구상하게 된 겁니다.
월롱산에서 구상한 ‘만주족’
병자호란을 마치고 고향 심양에 가서 자기 아버지 문수보살의 사상을 마지막으로 실현한 것이 ‘만주족’이라는 민족입니다. 만주족의 의미를 보면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민족개념입니다. 혈통중심이 아닌 문수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민족으로 ‘만주살이’라고 부르길 원하는 이는 누구나 만주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후 여진족은 120만 명에서 220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보여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으로 들어갔다고 보여지며 조선인이 상당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타이지는 문수의 뒤를 잇는 보현보살로 자칭하면서, 두 부자는 문수에서 보현보살로 그 삶을 잘 실천했다고 보여집니다. 만주족의 성과에 대해서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습니다.
‘만주족’같은 대민족 개념
혈통적으로 보면 동아시아에서 북만주, 한반도, 일본은 역사적으로 민족의 이동이 있었고, 문화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분명히 부여족, 말갈족, 맥족, 몽골, 여진 등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였죠.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이루었던 민족과 우리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지요. 고려, 조선시대로 가면서 우리와 역사적으로 혈통적으로 가까운 민족을 오랑캐로 배척하고, 문화적으로 영향을 준 중국과는 동질감을 갖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런 이상한 역사관을 갖게 되고 심화된 때가 조선시대의 성리학때부터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홍타이지가 생각했던 만주족의 개념으로 대민족개념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반도를 소민족 개념에서 동북아시아라는 대민족개념과 같이 멀리 보는 개념을 가져야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의 모습을 보고 만주족이라고 하는 신민족 개념을 창설했던 홍타이지를 다시 역사적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 다음호는 [심학산 서인과 노론의 뿌리]를 연재합니다.
묵개 서상욱 (역사칼럼리스트, 관인학사 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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