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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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읍 장곡리 삼거리에서 광탄 방면으로 차를 몰고 가다 보면 11시 방향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불상을 볼 수 있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다.
민간에서는 쌍미륵이라고도 부른다. 몸체는 자연의 거대한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부조로 새겼고, 머리는 목 ?얼굴 ? 갓 부분을 각각 환조로 조각해서 몸체 위에 올려놓은 형태이다. 왼쪽은 둥근 삿갓을 쓰고 있으므로 원립불(圓笠佛, 둥근 삿갓 부처), 오른쪽은 네모난 삿갓을 쓰고 있으므로 방립불(方笠拂, 네모난 삿갓 부처)이라고 부른다. 또, 원립불은 남성을, 방립불은 여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그동안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조형 수법이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나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마애이불입상의 조성과 관련된 고려 시대의 전설이 전하고 있어서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의 제13대 국왕인 선종에게는 원신궁주라는 후궁이 있었다. 아기를 낳지 못하던 원신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승려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바위틈에 살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주세요.”
원신궁주가 선종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했더니, 선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장지산 아래를 살피게 했다. 신하들이 장지산 아래에 두 개의 큰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장지산 바위에 두 승려의 모습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려라.”
선종이 두 승려를 기리는 석상을 새기게 하자 원신궁주가 왕자를 낳게 되었다. 이후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전설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마애이불입상의 몸체에서 발원문을 새긴 명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시대가 아닌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성화 7년(성종 2년, 1471) 발원문. 바라옵건대,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부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해 주시옵고…… 국왕(성종)께는 좋은 일이 있고, 대비(정희왕후, 세조의 비)께는 걱정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내세의 미륵여래대성이시어, 세조 대왕께서 미륵정토에 왕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조선 전기 성종 때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왼쪽의 원립불은 세조를, 오른쪽의 방립불은 정희왕후를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발원문에 ‘낙성(落成)’, ‘조(造)’, ‘성(成)’과 같은 글자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반박되었다. 새겨진 발원문은 조선 전기에 추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여전히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조성 시기에 대한 논쟁이 어찌됐든,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자식을 낳게 해 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식 없는 부모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있다.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모친께서도 이곳에 와서 기도하여 이승만을 낳았다고도 한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이곳에 찾아와 7층 석탑과 동자상을 보시하였다.
혹시 아이가 없는 부모라면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통해 소망을 빌며 위안과 행복을 누려 보시길…….
<지금은 보수 공사중이어서 용미리석불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정헌호 (역사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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