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시사칼럼> 일본의 굴레, 한국의 굴레 

입력 : 2021-04-07 09:10:24
수정 : 2021-04-08 00:52:37

<시사칼럼> 일본의 굴레, 한국의 굴레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과거 강대국이 차지했던 패권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인데, 저처럼 나라살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읽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잃은 뒤의 강대국은 일본이 될 것이라 예언하여 미래 예측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이 1987년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되기도 합니다. 1980년대 일본은 ‘자본주의의 모델’이었습니다. 당시의 미국은 ‘일본 배우기’ 열풍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중국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각종 압력들로 일본을 견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닮아서는 안 될 모델’이 되었습니다. ‘세계가 일본처럼 된다’는 말은 이제 불안과 공포를 넘어 저주에 가까운 말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 발전에만 치중할 수 있었던 일본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핵심은 자민당과 관료들의 ‘기득권 블록’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땅부자’ 정치인들이 삽질 경제를 통해 부동산 버블을 만들었고, 이에 따른 양극화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폐쇄적인 문화로 이민까지 막아버려 인구 감소가 급격히 진행되어 현재의 형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굴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40년을 산 태가트 머피라는 미국인 교수가 쓴 책입니다.  2011년 후쿠시마 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시민 의식에 비해, 일본 정부와 도쿄 전력의 기만적이고 무책임했던 일 처리 방식의 믿기 힘든 양면성에 대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정치’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최근 수십년 간 일본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안을 제시했던 세력이 ‘기득권 블록’과 연계된 미국의 공모와 개입으로 인하여 붕괴되는 과정을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엘리트들도 변해간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엘리트들은 상존하는 모순을 받아들이는 법과 자신의 동기를 스스로에게 숨기는 법을 연마하면서 동시에 그 숨은 동기에 충실히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본의 기득권세력이 현실의 모순에 순응하면서 더 나아가 충실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일본을 개혁해보려던 일본 민주당의 슬로건이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 ‘하얀 코끼리 사업에서 사회복지로’ 였습니다. 2010년의 한국과 같은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일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개혁 세력은 정치적 부족함으로 분열되고, 대중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기득권도 당혹스러워할 아베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일본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최근 국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국이 일본 된다’ 라는 걱정이 듭니다. 조직적인 정권 교체도 있었고, 역동적인 시민 사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야가 공유하는 비공식적 ‘합의 사항’은 자민당과 일본 관료들의 정책과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주택 정책도 일본과 거의 비슷한 대응과 실패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거품이 덜 생기게 하여 지속적으로 유지시킨다는 점이겠지요.

 

10년 전 예산 낭비의 대표 사례였던 ‘새빛둥둥섬’을 자랑스럽게 다시 찾아가는 당사자 정치인이나, 겨우 만들어낸 합의를 무시하고 가덕도 신공항을 강행하는 반대편 정치인들을 보면 십수 년 전으로 역사가 회귀하는 듯한 게 무리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책보다 네거티브만 보이는 것은 나쁜 언론의 탓도 있지만 정책에 차별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차별없이 양쪽 다 나쁘다는 생각은 그보다 더 나쁜 사람들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나은 대안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저자도 자신이 일본의 정부와 대학에서 지원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된 것 자체가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촛불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와 닿습니다. 현실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편승하다 못해 더 나아가 기득권이 되어버린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일본의 굴레’에 이어 ‘한국의 굴레’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해가려는 시민이 많습니다. 이것이 일본보다는 좀 더 희망을 가질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저희 나라살림연구소 존립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


신문협동조합「파주에서」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