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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로 가는 한 걸음(3) 갈등과 화해의 현장을 찾아서 1. 북한군, 중국군 묘

입력 : 2020-04-02 08:05:23
수정 : 2020-07-03 01:45:51

통일로 가는 한 걸음(3)
갈등과 화해의 현장을 찾아서 
1. 북한군, 중국군 묘

 

 ▲ 북중군묘지 앞에 참전국가의 국기가 펄럭인다


적군묘지를 아십니까?

   

문산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연천으로 향하다가 장파사거리를 지나면 왼편으로 북한국/중국군 묘지가 나온다.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번지, 휴전선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7km 거리이며, 대중적으로는 적군묘지로 알려져 있다.

국방부에 의해 1996년에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남한 내 격전지에서 발굴한 인민군 및 중국군의 유해를 모두 여기로 가져와 묻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고 인도주의 정신을 지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8년까지는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 시설로 육군 25사단이 관리하였다가 지금은 경기도청으로 이관됐다.

1묘역과 제2묘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묘역에는 6.25 전쟁 때 전사한 북한군 전사자들과, 중국군, 그리고 2묘역에는 1.21 사태 당시 무장공비,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때의 무장공비들의 유해가 묻혀있다.

부지는 총 6000규모이며 중국군 362, 북한군 718구 등 모두 1080구의 유해가 묻혀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때는 중국군 유해를 중국 정부에게 반환하기도 하였다.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는 매년 11월 이곳에서 위령 미사를 집전하고 있으며 불교인권위원회와 원불교를 비롯한 시민단체에서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내가 처음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2014년이었다.

적군묘지라고? 어감마저 섬뜩한 적군의 묘지가 남한 땅 파주에 있다니...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곳을 방문한 나는 생각보다 산뜻하게(?) 단장해 놓은 그곳을 보며 다양한 감정의 교차를 느끼고 있었다.

통일보다는 안보, ‘화해보다는 반공의 정서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파주 그것도 적성지역에 북한군과 중국군을 추모하는 묘역이 있다는 것에 다소 신선한 충격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반공 포로였던 아버지

 

한국전쟁 당시 우리와 총부리를 겨눈 북한군의 묘가 남한 땅에 존재한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가족들의 마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상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며 남남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름 없이 죽어서 이곳에 묻힌 이들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적군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우리의 부모형제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나의 아버지도 한 때(?) 인민군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선친은 갓 스무살 청년이었다, 인민군이 단숨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충청도와 낙동강까지 치고 내려가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인민군의 대대적인 후퇴가 이어졌다, 그 당시 서울의 누이 댁에 살고 있었던 아버지는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징발되었다. 원래는 아버지의 매형이 의용군으로 끌려갈 형편이었는데 매형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대신 끌려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졸지에 인민군이 되었다. 인민군이 되어 압록강까지 후퇴했다가 중공군(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남하하여 충청지역까지 내려온 아버지는 전투 중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원래 전쟁 포로는 포로 수용소에 따로 인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전쟁의 와중에 포로를 인솔하고 다니기 번거로운 관계로 즉결처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인민군이나 국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역시 국군의 포로로 끌려 가다가 어느 한적한 곳에 이르자 삽을 한 자루 받았다고 한다. 자기 무덤을 파라는 것이었다. 무덤을 파느라 삽질을 하던 중 아버지 목에 걸려있던 십자가와 묵주가 땅으로 떨어졌고, 마침 이것을 본 국군 장교가 천주교인이냐 물었고 아버지는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즉결처분을 면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만일 그 당시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당했더라면 이름 없는 인민군으로 유골이 수습되어 이곳 적군묘까지 올 수도 있었으리라.

 

▲ 예전의 북중군묘지의 모습 

 

 

구상 시인의 적군묘지 앞에서

 

전쟁 이후 남녘 땅 곳곳에는 미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유골이 많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국군은 유골을 수습하여 가족에게 인계 되거나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으나 인민군의 경우 그 지역에 그냥 묻혀버리거나 소규모 묘지로 조성되기도 했는데 이는 구상 시인의 적군묘지 앞에서라는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구상(具常, 1919 ~ 2004) 시인은 서울에서 나기는 했지만 북한의 원산에서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분이다.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1946년 시집 응향(凝香)’ 사건으로 반동 시인으로 몰려 월남했으며, 6·25 종군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구상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나로서는 시인의 시가 더욱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구상 시인이 이 시를 쓸 당시인 한국전쟁 직후에는 적군 묘지라 불리는 공동묘지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19967월 우리 정부에서는, 전국의 적군 묘지유해들을 현재의 위치에 모아 북한군/중국군 묘지로 조성하였다. 무덤 앞에 1미터 높이의 흰색 각목으로 된 비목을 세웠으며, 계급과 이름이 적힌 것은 20여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한 전투지역 이름과 함께 무명인이라 적었다. 이후 2008년에 비목들을 없애고 대리석으로 된 표지석을 놓았다.

 
 

▲ 새로이 조성된 북중군묘지, 중국군 유해는 송환되어  북한군 유해만 안치되어있다.



 

아픔과 갈등을 넘어 화해의 길로

 

시인은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 동족상잔이란 비극으로 생겨난 적군 묘지앞에서 이념의 허울 아래 희생된 적군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생존의 극한 상황인 전쟁 중에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원수 사이였지만, 가로막힌 휴전선으로 인해 넋조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에게서 저주와 증오보다는 동족으로서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누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한국전쟁 직후 전국 여러 곳에 적군묘지가 생겨났다. 이는 적군이기 이전에 한민족이여 한 형제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군, 중국군 묘지 입구에는 지난해 초부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16개 국가의 국기가 세워져 있다. 파주지역의 보수단체가 이를 주도하고 있으며 종교기관이나 시민단체가 이곳에서 추모하는 것을 저지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거나 상처를 받은 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나 역시 큰아버님이 납북되어 아직도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그 상처와 증오를 안고 지내야만 하는가.

과거의 상처를 서로 보듬고 화해하자는 것은 북한의 정치 이념과 체제에 동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눴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다는 시인의 절규에는 죽어 타향에 묻힌 적군들만이 아니라 분단으로 가로막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시인의 한까지 담겨 있다. 적군으로 죽어 타향에 묻힌 저들이나 살아 있음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시인은 바로 분단의 고통과 통일에 대한 염원이라는 동질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은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에 합의했다. 그리고 이후에 이루어진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사상 최대 규모의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도 이루어졌다. 비록 비핵화 협상을 위한 과정이기도 했지만 인류애에 바탕을 둔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은 북미 간,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 땅에 있는 적군 묘지, 바로 북한군/중국군 묘지에 묻힌 유해도 북한으로 송환하고, 북한 땅에 있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발굴되어 송환하는, 그래서 그동안 풀지 못한 원한도 풀리는 날이 오기를 이곳 적성의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앞에서 기원한다.

 

 이철민 /참회와 속죄의 성당 민족화해분과정/ 도서출판 바이칼 대표 

 

 #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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