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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에서 국익이란 무엇인가? : 언론의 정파성이 삼켜버린 국익

입력 : 2019-09-16 0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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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에서 국익이란 무엇인가?

                       : 언론의 정파성이 삼켜버린 국익

 

출처 :  프로파일 신문과방송 ・ 2019. 9. 2. 14:28

편집자주>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방송]에  실린 이 칼럼을 [파주에서]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홈페이지에 게재한다.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등 일본의 수출 규제가 명백한 경제 보복으로 여겨지며 반일 감정과 불매 운동이 달아오르고 있다. 국민감정이 불편한 이 시점에도 한국 언론은 마치 다른 두 나라처럼 갈렸다. 진정한 국익 논쟁이 아닌 정파성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모양새다. 보다 생산적인 국익을 위해 언론이 문제 해결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국익(國益, national interest)은 17세기 이후 근대 주권국가의 성립과 함께 탄생한 개념이지만, 본격적인 학술적 분석과 논의의 대상이 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꽃을 피운 정치 현실주의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하면서부터다. 미국 현실주의 학파의 선도자였던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는 1948년에 출간한 《국가 간의 정치》에서 국제정치는 사실상 ‘국익의, 국익에 의한, 국익을 위한’ 정치임을 천명하고 나섰다. 모겐소는 국익을 명확히 정의하진 않았지만, 도덕과 정의를 내세우는 도덕주의적 외교를 비판함으로써 사실상의 정의를 대신했다. 그는 ‘바람직한 것’과 ‘가능한 것’의 엄격한 구별을 요구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개인 입장에서는 ‘세계가 망할지라도 정의를 실현하자’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국가를 책임지는 정치가에게는 국가가 망하더라도 정의를 실현하자고 말할 권리가 없다.”1)

국익 논쟁과 언론의 자세

국가 간의 관계에서 힘을 숭상하는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성하다. 하지만 그건 주로 학계나 언론계에서 나오는 것일 뿐, 현실주의가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 정부의 기본 노선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그래서 정부와 언론 사이의 갈등은 불가피해진다. 언론은 도덕과 정의를 외면할 수 없으며, 또한 언론은 국익 못지않게 중요한 ‘진실 보도’라는 가치를 섬겨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국익을 누가 정의하느냐의 문제는 그런 갈등을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1970년 《국익》의 저자인 조지프 프랑켈(Joseph Frankel)은 “국익의 정의는 이기적과 이타적, 단기적 관심과 장기적 관심, 적극파와 소극파, 전통과 혁신,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등과 같은 여러 가지의 양극 사이에서 개인이 취할 입장에 달려 있다”고 전제한 뒤 “결국 그 모든 경우에 이분법에 의하지 않고 양극 간에 산재하는 점들을 보아 어떤 경험적인 지표에 따라 측정함으로써 그 위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다.2)

2005년 12월 2일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논란과 관련해 열린 <PD수첩> 제작진 기자회견 현장 ©연합뉴스

프랑켈의 견해는 원론 표명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국익에 대한 정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익은 각종 이해관계의 교차로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①단기적 국익과 장기적 국익, ②직접적 국익과 간접적 국익, ③구체적 국익과 추상적 국익, ④측정 가능한 국익과 측정 불가능한 국익 등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다. 게다가 국익 수호의 주체를 자임하고 나서는 정부가 내세우는 국익이 ‘진정한 국익’인지 ‘정권의 정파적 이익’인지 판별하기도 쉽지 않다. 권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철학적 문제도 가세한다.

국익 논쟁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미국의 ‘펜타곤 기밀문서’ 사건(1971년) 당시 연방대법관 휴고 블랙(Hugo L. Black)은 이 판결의 보충 찬성의견에서 “언론은 통치자(統治者)가 아니라 피치자(被治者)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언론은 정부의 비밀을 폭로하고 국민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다. 오직 자유롭고 제약받지 않는 언론만이 정부의 속임수를 효과적으로 적발할 수 있는 것이다.”3) ‘펜타곤 기밀문서’를 언론에 넘긴 전 국방성 관리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펜타곤의 문서로부터 내가 얻은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미국에서조차도 권력은 부패하기 때문에 권위, 대통령, 권력의 소유자를 불신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

‘펜타곤 기밀문서’ 사건처럼 국가기밀과 관련된 언론·정부 간의 갈등이 국익 논쟁의 핵심인 것처럼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사실 국익 논쟁의 전모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언론이 국익을 대하는 자세는 국익에 대한 인식, 언론인의 가치관, 상업주의, 언론윤리, 정치적 환경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익 개의치 않고 쏠림 현상 보이는 한국 언론 역사적 경로 의존에 의해 형성된 전반적인 언론문화 풍토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일본 언론은 국익을 내세워 언론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한국 언론은 무슨 사건이건 국익에 개의치 않고 ‘쏠림 현상’을 보인다. 2000년 봄 한국과 일본에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한국 언론은 국익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일 대서특필해댄 반면 구제역과 관련한 일본 6대 신문의 총보도량은 한국 신문 하나의 하루 보도량보다 훨씬 적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뉴스를 24시간 방송하는 영국 BBC는 한국 특파원이 제작한 구제역 관련 기사를 자세히 보도했지만, 일본도 구제역 피해를 보았다는 보도는 단 한마디도 나가지 않았다.5)

국익을 내세워 여론몰이를 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이슈건 국익과 무관할 수는 없다 보니, 국익이라는 단어의 오남용이 매우 심하다. 특히 국가주의·민족주의·애국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국익 논쟁은 ‘정부 대 언론’의 단순 구도를 벗어나 모든 정치세력과 언론, 그리고 시민사회까지 참여하는 전방위적 소용돌이형 논란으로 자주 비화되곤 한다. 일반적으론 보수가 ‘국익 우위론’, 진보가 ‘진실보도 우위론’에 기우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에서 이 원칙은 통용되지 않는다. 이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건 바로 정파성이다. 언론이 국익 관련 사안에서도 ‘정파적 입자’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6) 문제는 정파적 충돌이 발생하면 국익의 실체성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이른바 ‘애국 프레임’을 선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국익’이라는 단어를 워낙 오남용해댄 탓에 이 단어는 거의 걸레가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전규찬은 “국가안전이나 국방, 외교 분야 기밀사항 등이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 침해가 우려되는 매우 제한된 정보 보호에만 국익이라는 말이 쓰여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7) 국익이라는 단어의 후광효과를 노리는 사람들은 오히려 국익을 더 넓혀 쓰는 게 현실이다. 박종인은 언론이 ‘자발적 국익 판단’을 자제하면서 ‘국익 판단을 위한 합의나 토론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8) 언론은 오히려 정반대로 ‘국익 판단의 신(神)’이나 된 것처럼 확신에 찬 공격적 논조로 일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익 논쟁의 한국적 특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 바로 2005년에 일어난 ‘황우석 사태’다.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국익우위론의 주체가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는 일반 네티즌들이었고, 여기에 평소 ‘국익’을 사랑하는 보수 언론과 보수 시민들이 가세했다는 점이다. 희한한 좌우합작이 이뤄진 가운데, 진실 보도 우위론을 내세운 프레시안, 문화방송, 한겨레 등 소수 언론은 ‘매국언론’으로 낙인찍힌 반면, 평소 친노 네티즌들이 비판했던 보수 언론은 졸지에 ‘애국 언론’으로 승격됐다.

국익우위론의 진앙지는 노무현 정부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황우석의 연구현장을 방문해 “황 교수의 연구야말로 2만 달러 시대를 앞당길 마술이다. 그의 연구에 감전됐다”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황우석에게 과학기술최고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황우석의 노벨상 수상 지원까지 시사했으니, 지지자들이 어찌 ‘국익 수호의 전사’로 나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황우석 신화’는 2005년 12월 MBC <PD수첩>의 논문 조작 폭로 보도로 붕괴되기 시작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대표적인 ‘국익 수호의 전사’였던 유시민은 <PD수첩> 방영 직후 “내가 보건복지위원을 해봐서 아는데 PD수첩이 황우석 박사 연구를 검증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언론자유가 너무 만발해 냄새가 날 지경이다”고 주장했으니,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진보마저 권력을 잡으면 개발독재시대의 국익론을 그대로 따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파성이 민주-반민주, 진보-보수의 경계를 초월하는 상위 개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당시 <PD수첩> 은 “진실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결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며 국민의 이해를 구했지만, 정파성이 국익을 삼켜버린 상황에서 이성적 토론은 불가능했다.9) 이욱연이 지적했듯이, 당시 상황에서 황우석은 삼성과 더불어 “아무도 도전하거나 시비할 수 없는 존재, 범할 경우 전국민적 노여움을 사고 재앙을 받는 신성불가침의 속신(俗神)”이 됐다.10)

정파성 도구 아닌 문제 해결 위한 공론장 돼야

최근 한일 관계를 둘러싼 국익 논쟁도 국익이 정파성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아니 국익 논쟁이라기보다는 내부 분열 투쟁에 가깝다. 문제는 논쟁의 알맹이라기보다는 스타일이다. 선의로 해석하면 다 이해할 수 있는 노선과 방법의 차이임에도 왜 모질고 독한 말로 상대편에게 타격을 주려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걸까? 양측이 늘 해온 격렬한 정파적 투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라,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국익을 어떻게 정의하건, 국익이 정파성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한 상황에선 생산적인 토론은 가능하지 않다. 언론까지 편 갈라 싸워 공론장이 실종된 상황에서 무슨 논쟁이 가능하겠는가. 한 서양 언론인의 이런 지적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매일 한국의 진보 매체와 보수 매체 사이트를 방문해 기사를 읽는다. 10년 넘도록 각 매체의 프리즘을 통해 비치는 한국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두 나라처럼 나뉘는 걸 보며 지금도 깜짝깜짝 놀란다.”11) 한일 관계를 주제로 한 정상적인 국익 논쟁이라면, ‘바람직한 것’과 ‘가능한 것’ 사이의 선택이나 절충을 둘러싼 합리적 논쟁이 돼야 옳다.

대학생 통일대행진단 소속 대학생들이 지난 8월 14일 서울 세종대로 외교부 청사 앞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촉구 집회를 마치고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마음속에 사실상의 독립 국가를 세운 각 정파는 그런 논쟁엔 관심이 없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이른바 ‘내로남불’을 상시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승자독식’ 체제가 주범이다. 승자가 모든 걸 누리며 정치적 ‘지대 추구’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체제 하에선, 수백만 유권자들까지 가세한 가운데 권력 투쟁에서의 승리가 국익에 우선하게 돼 있다. 우리는 이런 근본 원인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면서 화합과 단합과 국익을 부르짖는 ‘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체제 하에선 언론은 정파성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언론은 반대편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엔 매우 능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을 고민하는 법은 없다. 언론이 정파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문제 해결의 공론장 수행 역할에 큰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정파성과 국익 사이의 균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언론이 그 어떤 나라의 언론보다 더 ‘솔루션 저널리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라 하겠다.


1) 한스 모겐소, 이호재·엄태암 역, 《국가 간의 정치: 세계평화의 권력이론적 접근 1》, 김영사, 88·100쪽, 2006/2013.

2) 팽원순, 《현대신문방송보도론》, 범우사, 25-26쪽, 1989.

5) 이도운, <한·일언론의 구제역 보도 태도>, 대한매일, 2000. 4. 6, 7면; 조원량, <구제역 과잉보도 자제해야>, 한겨레, 2000. 4. 11, 11면.

6) 최종환·김성해·이현주, <언론의 정파성과 국가이익: 전시작전권 프레임 분석을 통해서 본 진영논리의 실체>, 《미디어와 공연예술연구》, 10권1호, 69-106쪽, 2015.

7) 전규찬, <가짜 ‘국익’의 선전도구로 전락한 언론: 국익과 진실보도>, 《신문과 방송》, 제421호 19쪽, 2006. 1.

8) 박종인, 《국익과 진실보도》, 커뮤니케이션북스, 28-36쪽, 2006.

9) 손제민, <진실이냐, 국익이냐?: 황우석 파문과 한국 저널리즘>, 관훈저널, 제98호, 19-25쪽, 2006.

10) 이욱연, <삼성 공화국과 황우석 신화>, 시사저널, 2005. 6. 3.

11) 권재현,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펴낸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경향신문, 2015. 6. 6.

글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출처] 언론보도에서 국익이란 무엇인가? : 언론의 정파성이 삼켜버린 국익|작성자 신문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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