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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을 말하다’ - 파주시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전태일 50주기 파주시민추진위 주최

입력 : 2020-09-28 08: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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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을 말하다’ 25일 파주시 정책포럼회 열려

파주시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전태일 50주기 파주시민추진위 주최

 

 

 

파주시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센터장: 이재희)와 전태일 50주기파주시민추진위는 25일 저녁 7시 파주스태디움 1층 회의실에서 청년 전태일을 말하다란 제목으로 파주시 정책포럼회를 열었다.

민우회, 환경운동연합 회원,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비정규직 회원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강연회에서 이수호 전태일 재단 이사장은 영원한 청년 전태일의 치열했던 삶을 조명했다.

이 이사장은 전태일은 비록 적게 배우고 어렵게 살아왔지만 불평등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던져가며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했다. 그의 순수한 열정은 이후 노동운동을 거쳐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우리 모두 전태일이 되자고 말했다.

 

 

노동자의 인권을 외치며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불씨로 지금도 살아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1969년 노동청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6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는 봉제공장의 실상을 알리고 시정을 촉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는 그해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결성했다. 현실의 벽을 느낀 전태일은 노동현장을 떠나 다니던 교회와 엠마뉴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 서울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등을 찾아다니며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하였으나 묵살 당했다. 또 전태일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10월부터는 한층 치열하게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주도했다. 당해 11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했다.

사건당시 그는 친구 김 모 씨에게 자기 몸에 불을 붙여달라고 했고 불이 전신에 붙은 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방치된 채 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원에 도착했으나 근로감독관이 치료비보증을 거부했고 이어 옮겨진 명동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을 방치, 결국 당일 밤 10시경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방치되고 거부된 그의 치료 때문에 그의 죽음은 타살로 분류되고 있기도 하다. 죽기 전 그는 동료들에게 자기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재 확산되었다.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83년 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911차 개정판에 이르러야 저자 본명 밝혀져

전태일 평전은 인권 변호사였던 조영래가 19836월 썼으나 저자의 이름은 군사독재시절 내내 비밀에 붙여졌다. 19911차 개정판에 이르러야 저자의 본명이 비로소 밝혀지기도 했다.

조영래는 당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면서 6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중 3년 동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전태일의 동료를, 전 씨 주변인들을 만나 폭넓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노동운동가였던 장기표가 이소선으로 전해 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정리하여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이름으로 출간한 것이 전태일 평전의 모태가 된 것이다. 조영래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되기 1년 전 폐암으로 사망했다.

 

84년 전태일 기념사업회로 개칭, 85년 전태일 기념관 만들고 작년 청계천으로 이전.

너는 나다란 전태일의 외침대로 더불어 사는 평등세상만들자

전태일 재단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였던 1981년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로 발족, 84년 전태일 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국내 외 모금으로 85년 기념관이 종로구 창신동에 어렵게 개관됐다. 이후 전태일기념사업회는 노동자 교육사업과 노동현장에 민주노조 건설 등의 조직지원 사업들을 진행하고 각 지역에 노동상담소를 개설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88년 부터는 한 해 동안 가장 모범적으로 노동운동을 한 단체나 개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전태일 노동상과 또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삶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전태일문학상도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94년에는 8천여 명에 달하는 국민모금방식을 통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 됐다. 전국 60여개 극장에서 80여만 명이 관람한 이 영화는 종영이후 후원자들에게 후원금을 상환하고 소식지 사람세상을 발송해왔다.

이날 강연을 한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과 48년생 동갑내기다. 교사였던 이 이사장은 90년대 전교조 위원장을 지냈고 민주노총 위원장을 거쳐 20155월 제 10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지냈다.

현 전태일 기념관은 청계천 수표교 인근(청계천로 105)에 지상 6층 연면적 581평 규모로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작년 4월에 건립됐다.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의 근본 사상은 그가 외치던 너는 나다란 말로 축약할 수 있다. 그의 평등정신을 이어받아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역설했다.

 

김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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