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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32) 혁신학교, ‘반쪽짜리 집’  

입력 : 2020-10-22 12:11:15
수정 : 2020-10-23 02:38:23

전종호의 교육칼럼 풀씨 (32) 혁신학교, ‘반쪽짜리 집

 

작가 전종호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반쪽짜리 집

 

알렉한드로 아라베나라는 젊은 건축가가 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그는 칠레의 사막 중앙에 있는 이쿠익 시에 불법 거주자를 위한 집을 지어주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턱없이 부족한 정부 예산으로는 이들이 살 넉넉하고 편안한 집을 지을 수 없어 먼저 건물의 반만 짓고, 나머지는 입주자들이 형편이 좋아지면 스스로 지을 수 있도록 반쪽 공간을 비워둔 반쪽짜리 좋은 집(Half of a Good House)’을 지었다. 예산에 맞춰 작은 집을 지은 게 아니라, 건축가는 예산을 고려하되, 가난한 거주자에게 집의 확장이라는 목표와 경제활동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하려 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로 그는 공공 서비스 개념의 건축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혁신학교는 아라베나의 반쪽의 집의 꿈과 같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조건과 원칙만을 제공하고 나머지는 구성원이 스스로 자활 능력을 키워 집을 채워가는 방식이 그렇고, 사회 참여를 유도하는 공공 서비스 건축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혁신학교는 새로운 집짓기다. 해방 이후 60년은 미국식 학교제도가 이식된 기간이었다. 미국식 학교제도는 근대화에 기여하고 신생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지만, 한편으로 민주성과 생산성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혁신학교는 완전한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기본철학과 기본과제만을 제시한다. 어떤 모양의 집을 지을지, 어떤 재료로 벽을 세울지, 지붕을 어떤 재료로 구성하고 어떤 색깔로 칠할지는 학교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한다. 땅 모양에 따라 네모나 세모의 집이 될 수도 있다. 식구 수에 따라 방의 개수나 모양이 달라질 수 있고 가족의 욕구에 따라 내부의 공간구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도시, 농촌 관계없이 비슷비슷 대동소이 아파트 형태의 집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혁신학교는 철학으로 집의 기초를 삼는다. 한국교육의 반교육성을 바로잡는 의미를 갖는 혁신학교 5대 철학은 공공성公共性을 기반으로 창의성, 윤리성, 전문성, 민주성이다. 2009년 출발 당시에는 자발성, 지역성, 창의성, 공공성을 기본으로 삼았으나 2011, 2015년에 약간씩의 변화를 거쳐 지금의 5대 철학으로 확정되었다.
공공성은 혁신학교 철학의 기본원리로, 혁신학교의 사회적 지향과 가능성의 평등을 통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사실 그간 우리 교육은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헌법과 교육기본법상의 교육목적은 철저히 무시되고, 공교육은 입시교육으로 변질되어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지위 경쟁이라는 사적 이해 다툼의 마당이 되었다. 학교도, 국가지원의 교육비도, 공무원인 교사도 사적 이해관계 추구의 도구로 전락한 교육 현실을 바로 잡자고 하는 것이 공공성의 원칙이다. 이에 따라 학습복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창의성은 교육내용의 창의성을 통해 창의적인 인재를 육성하고자 함이다. 우리 교육은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주입식 암기 교육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지식의 완전성에 기초한 교육으로 과거의 문화에 중점을 두고 미래를 준비하는 관점이다. 이제 지식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으로, 교육의 초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주입식 암기 교육으로는 4차산업혁명으로 비유되는 미래의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혼재하는 시간과, 동서양의 공간을 압축하고 넘나드는 새로운 창의적인 인재가 요구되는 것이다. 창의성은 교육의 생산성 또는 효율성과 관련이 있다.

민주성은 구성원의 인권보장과 책무성을 바탕으로 민주적 학교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개발독재 국가에 살면서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며 살았다. 국가목표에 동원된 학교도 관료주의에 심하게 물들어 학교 내부구성원의 의견을 모으며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윤리성은 학교 구성원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이다.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교직원과 교직원 사이에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며 서로의 성장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학생은 배우는 자의 본분을 지키고, 교원은 가르치는 자의 사명과 교직의 의무를 다하며, 직원은 조직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전문성은 교직의 깊이와 성찰을 요구한다. 교사는 교육과정과 관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국가교육과정의 단순 전달자이기보다는 교육과정을 학교와 학생에 맞춰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 특히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교육과정을 실현하는 관계 전문가로서의 교사상이 요구된다.

철학이 혁신학교라고 하는 집의 기초라면 이 기초에 세워질 기둥이 4대 중점과제이다. 4대 중점과제는 학교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규정한 것이다. 혁신학교 초기에는 교육과정 다양화·특성화, 전문적 학습공동체 형성, 교수학습중심의 운영시스템 구축, 생산적인 학교문화 형성, 대외협력 참여 확대, 권한위임체제 구축이라는 6대 중점 과제가 추진되었으나, 20124대 과제로 요약되고, 이후 약간의 명칭 변경을 통하여 현재 창의적 교육과정, 윤리적 생활공동체, 전문적 학습공동체, 민주적 학교운영 체제가 철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 4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학교는 결국 교육과정이다. 학교의 행정과 교사의 전문성과 학교문화도 교육과정 운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교육철학에서 시작하여 교육내용의 선정과 조직, 교수(수업), 평가에 이르는 일련의 순환과정을 의미하며, 교육의 목적과, 지식·기술·태도 같은 교육내용이 최종적으로 학생의 머리와 마음 밭에 떨어져 작동할 때 완성된다. 혁신학교는 교육과정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정상화, 다양화되어야 하며, 학생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배움중심 수업이 이루어져야 하며, 학교와 교사는 교육과정 운영에 책무성은 물론 윤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창의적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해서 학교는 윤리적 생활공동체와 전문적 학습공동체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윤리적 생활공동체는 학교 구성원의 학교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구성원은 상호 존중과 배려가 몸에 배여 하나의 문화가 되어야 하며, 각종 사고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 자신과 타인, 나아가 자연의 권리가 존중되고 공존과 공생을 실천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민교육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교사는 가르치는 자로서 스스로 배우고 섬기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학교조직 자체가 학습조직이 되어야 하고, 교육과정의 공동연구, 공동실천의 수행자가 되어야 하며, 교육과정 전문가로서 교육과정의 재구성에 대한 노력과 수업의 개방과 성찰에 노력해야 한다. 교사는 교실주의, 수업의 사적 소유를 넘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학교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학교의 비전과 책무성을 학교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역동적 학교문화를 위해서 교장의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한다. 행정은 교육과정행정으로, 교육활동을 중심에 두는 학교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학교는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사회 학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역사회 학교란 학교에 필요한 자원을 지역사회에서 조달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에도 나름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 문제는 생산성과 민주성의 결여에 있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거나,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지식과 인재를 학교에서 배출하는 것이 생산성의 문제라면,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결정하는 방식의 문제는 민주성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교육부나 교육청 관료들이 결정했다면, 이제 학교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바로 이것이 바로 혁신학교의 목표이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혁신학교는 5대 철학의 기초 위에 4대 중점과제라는 기둥을 제시할 뿐, 내용과 방법은 오로지 구성원의 의지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정책당국은 단위학교의 구체적인 활동에 간섭하지 않고 이들의 의도와 의지를 도울 수 있는 지원 창고만을 운영하고 있다. 혁신학교 지원체제가 바로 그것으로, 이 창고에는 학교 자율권 확대 및 행·재정적 지원, 혁신학교 근무자를 위한 혁신학교 아카데미, 담당자 양성을 위한 혁신 리더 연수, 혁신대학원 지원, 혁신교육지원센터 운영, 혁신교육 네트워크 지원 등이 보관되어 있다. 혁신학교는 천편일률적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땅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도시와 농촌의 사정이 다르고, 거주자의 연령에 따라, 가족의 구성과 수와 욕구에 따라 필요로 하는 집이 다른 것처럼, 도농, 학교급별, 지역별, 설립별로 각자 필요한 맞춤형의 학교를 만들어가는 것이 혁신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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